생각해보면, 『논어』라는 책이 내가 읽을 때마다 바뀌었을 리는 만무하고, 실제로 변한 것은 그 책을 읽는 나다. 내 나이, 지식,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 나를 둘러싼 사회와 그 사회에서의 내 위치가 변화했고, 그에 따라 책이 내게 말해주는 바도 변화했다. 이처럼 『논어』를 읽는다는 것은 내 시선이 책에 꽂힘과 동시에 책 속의 구절이 내 마음에 꽂히는 양방향 소통을 의미한다. 마치 내가 거울을 봄과 동시에 거울이 내 모습을 비추는 것처럼 말이다. 『논어』를 비롯한 고전은 이처럼 나와 사회를 돌이켜[反] 성찰하는[省] 계기를 제공하는 거울이라고 할 수 있다.
--- p.6, 「서문」 중에서
한 사회의 도덕성 여부는 그 사회를 다스리는 지배층의 도덕성 여부에 달려 있었다. “지배층은 바람과 같고 피지배층은 풀과 같아서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그 바람의 방향에 따라 눕는다(君子之德風, 小人之德草. 草上之風, 必偃.―「안연」)”라는 공자의 말처럼, 지배층과 지배층이 시행하는 정책이 도덕적인가 아닌가는 피지배층의 도덕적 교화 여부를 결정한다. 하지만 공자가 직면한 당시 현실에서 지배층은 도덕적이지 못했다. 즉 지배층답지 못했다.
--- p.15, 「1장 유가의 창시자, 공자」 중에서
공자에게 제자들은 단순히 사상을 전수하는 대상일 뿐 아니라 학문적, 정치적 동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스승을 사랑하고 존경했지만 스승의 잘못에 대해서는 분명히 지적했고, 공자 역시 그들의 지적이 타당했을 때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한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군색한 변명을 늘어놓기도 하는데, 이러한 변명은 오히려 공자가 권위적 태도로 제자들 위에 군림하지 않았음을 추측하게 한다.
--- p.34-35, 「1장 유가의 창시자, 공자」 중에서
『논어』는 누구에 의해서 지어진 것일까? 중국 고전에 대한 많은 해설서를 남긴 대만(臺灣)의 학자 굴만리(屈萬里, 1907~1979)(……)에 의하면, 『논어』는 공자와 제자들의 언행을 재전제자(再傳弟子), 즉 공자를 스승으로 섬긴 제자들의 제자들이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논어’라는 명칭은 공자가 제자나 당시 사람들과 응답한 ‘말[語]’, 제자들끼리 서로 나눈 ‘말’, 제자들이 공자에게서 들은 ‘말’들을 재전제자들이 ‘의논하여[論]’ 편집했음을 의미한다.
--- p.39-40, 「1장 유가의 창시자, 공자」 중에서
문화대혁명 당시에 철저히 배척되었던 공자를 부활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가 현재의 중국 공산당 정권에게 공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들이 공자와 그 사상의 어떤 측면을 필요로 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공자를 왜곡하지는 않을지에 대해서는 두고 볼 일이다. 그전에 우리가 할 일은 공자 사상에 대한 적절한 이해일 것이다. 그래야만 만약에 자행되는 왜곡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니까.
--- p.65, 「1장 유가의 창시자, 공자」 중에서
이 책에서는, 『논어』의 첫 구절을 이 세 문장으로 결정한 편찬자들의 소개를 따라서, 공자의 사상을 ‘학습(學習)’, ‘벗(朋)’, ‘군자(君子)’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논어』에 나타난 공자 사상의 최종적인 귀결이 ‘군자’에 있음을 말할 것이다. 즉 ‘학습’하고 ‘벗’과 교유함으로써 공자가 추구했던 것이 이상적인 인간인 ‘군자’라는 점을 말하고자 한다.
--- p.74-75, 「2장 『논어』 읽기」 중에서
공자는 배움에 뜻을 둔 열다섯 살 이후에는 다른 어떤 것에 의도적으로 뜻을 두지 않았다. 열다섯 살에 배움에 뜻을 두고 계속 노력해 나아가자, 나이 서른에는 그 뜻이 확고하게 수립됐고, 마흔에는 외부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게 되었고, 쉰에는 하늘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예순에는 모든 것을 거슬림 없이 받아들이게 되었고, 일흔에는 결국 내 멋대로 하더라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 p.86-87, 「2장 『논어』 읽기」 중에서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에서의 ‘붕(朋)’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친구(親舊)’와는 약간 다른 의미를 갖는다. 친구의 사전적 의미는, 글자 그대로 오랫동안[舊] 친하게 지낸[親] 사람이다. 즉 친구 여부를 가리는 요소 가운데 중요한 것이 기간의 장단이다. 물론 서로 전혀 뜻이 맞지 않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기는 쉽지 않겠지만, 친구인지 여부는 뜻이 맞는가가 아니라 기간의 장단에 달려 있다. 그에 비해서 ‘벗’의 사전적 의미는 ‘마음이 서로 통하여 가깝게 사귀는 사람’으로서,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다. 여기에서의 ‘붕’은 친구보다는 벗으로 번역해야 한다.
--- p.106, 「2장 『논어』 읽기」 중에서
공자는 이러한 인과 예의 관계를 앞에서 다룬 “바탕과 꾸밈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다음에야 군자이다”라는 언급을 통해서 표현했다. 여기에서의 ‘바탕’은 ‘인’이고, ‘꾸밈’은 ‘예’이다. 인을 바탕을 바탕으로 삼고 예를 꾸밈으로 삼아 인과 예가 아름답게 어우러진 사람이 이상적인 인간인 군자인 것이다. 공자에게 지배층다운 도덕성을 갖춘 군자는 내면에 ‘사람 사랑’을 품고 있으면서 그것을 적절한 예로써 표현해내는 인격체라고 할 수 있다.
--- p.167, 「2장 『논어』 읽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