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식 기도와 불교 명상 간의 근본적 차이점은 유념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창조자인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반면, 다른 하나는 ‘공(nothingness)’에 관한 이해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적이 다른 이 수단들은 서로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예수 기도를 반복하는 동안 수도사는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가슴 부위에 고정’한 채 앉아서 호흡을 조절한다. 그리고 헤시카즘의 기도와 마음챙김 명상은 모두 생각을 깨어 있는 의식 아래에 두면서 몸과 마음의 경계를 허무는 과정이 따른다. 마음챙김 명상에서는 몸 그 자체가 마음챙김이 된다. 자신의 전 존재로 기도를 올리는 사람은 스스로 기도 자체가 된다. 또한 마음챙김 명상과 비교되는 신체적 요소들은 집중 상태를 돕기 위한 것인데, 불교에서는 이런 집중 상태를 명상 대상과의 합일, 즉 ‘사마디samadhi’라고 한다. 신과 합일되는 상태인 테오시스는 신의 선물인 동시에 그 선물을 받을 수 있도록 스스로를 준비시키는 일종의 명상 과정이기도 하다.
--- 「하나 | 수도원에서 만난 침묵」 중에서
최근 들어 에솔렌은 정신적 토대인 반문화 운동의 원칙을 저버렸다고 비난받았다. 원인 중 하나를 꼽자면, 이런 단체에 기대하는 ‘진실성 ’이라는 막중한 짐 때문이다. 물론 ‘무엇이 진짜인가?’라는 문제는 모든 형태의 관광업에서 성가신 일이고, 특히 중산층이 대상인 경우는 더 까다롭지만, 제공되는 서비스가 진실성 그 자체일 때는 그 부담이 훨씬 크다. 사람들은 신체적·정서적·영적 차원의 진실성과 온전성을 회복하기 위해 에솔렌 같은 장소를 찾기 때문에 그곳에서 온전한 서비스를 보장받아야 한다. 착취나 부정의 흔적이 감지되기라도 하면 게임은 그것으로 끝이다.
이 문제는 현대식 자기 계발이 동양 종교와 서양 심리치료가 뒤죽박죽된 복합적인 성격을 띤다는 사실 때문에 한층 더 복잡해진다.
--- 「둘 | 휴양과 휴가로 변질된 웰니스형 은거」 중에서
마이클 신부와 동료 수사들이 추구한 금욕이 기도를 방해하는 장애물을 체계적으로 제거해 나가는 과정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사라에게도 침묵을 추구하는 일은 신과의 직접적 대면을 향한 열망과 뗄 수 없었다. 2008년 출간한 회고록 《침묵의 책(A Book of Silence)》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침묵은 신성과의 접촉을 앞당길 수 있는 초점이자 장소이다. 내가 보기에 사람들이 끊임없는 소음으로 침묵을 깨려고 하는 것은 그 성스러운 접촉에서 오는 신성한 공포를 회피하려 하기 때문이다.’
--- 「셋 | 수도사의 침묵과 명상가의 침묵」 중에서
‘수행자가 침묵의 고독 속에 머무를 때, 명상과 사유가 언제나 그와 함께할 때, 그가 욕망에서 자유롭기를 끊임없이 추구할 때, 그의 이기심과 폭력과 자만심이 사라졌을 때, 그리고 ‘이것은 내 것이다’라는 생각에서 자유로워졌을 때, 그때 그 수행자는 가장 높은 산의 정상에 오른 것이다. 그는 브라흐만Brahman, 즉 신과 하나가 될 자격이 있다.’
--- 「넷 | 열망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 중에서
서양 문화에서 ‘나’가 머무는 장소이자 개인적 정체성의 토대로서의 자아 개념은 놀라울 정도로 생명력이 강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불교 형이상학에서는 자아가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 반면, 서양인에게는 비록 일관되지 않은 조각들의 무더기에 불과할지라도 자아는 존재했다. 이는 서구화한 명상들, 특히 상업적 웰니스 센터에서 훈련하는 명상 수행에 내재한 모순과도 연관이 있다. 자아의 허구성에 기초한 불교식 명상 전통을 어떻게 자기 계발을 돕는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을까? 우리는 리치 데이비슨이나 삿 비르 싱 칼사 같은 이들을 통해 숙련된 명상가들의 초월적 상태가 ‘자아와 연관된 인지 처리 과정’, 즉 우리 자신과 관련된 생각에 관여하는 두뇌 영역의 비활성화와 관계된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자아의 스위치를 끄기만 해도 영원에 더 가까워진 기분을 느끼게 되는 셈이다. 초월적 상태와 자아감각은 단순히 공존 불가능한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상극이었다.
--- 「다섯 | 서양의 자아개념과 동양의 무아」 중에서
예술가의 대표적인 표식은 ‘고립 속에서 인간적 성장을 지속하는’ 능력이며, 나머지 사람들은 ‘주로 다른 사람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심리적으로 성숙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에게 동료가 필요하듯, 예술가는 은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들과 종교적 은자들 사이의 차이점은 은거의 목적에 있다. 사라는 내게 ‘글쓰기는 자아의 훌륭한 활동이야. 그리고 기도는 자아에서 벗어나는 행위이지’라고 말했다. 사라가 《침묵의 책》에서 주장하듯, 낭만주의 시인들이 고독을 추구한 것은 사막의 은자들처럼 스스로를 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만의 고유한 목소리’를 발견하기 위해서였다. ‘자아’라는 수도원을 건립하는 일인 것이다. 이처럼 예술가의 은거는 종교적 은자의 은거와 비슷해 보이지만, 그 목적은 서로 완전히 달랐다.
--- 「여섯 | 예술가의 은거와 수도사의 은거」 중에서
기업이 도용한 마음챙김은 직원들의 수동성을 부추겨 사내 권력 구조를 유지하는 경향이 있다.…‘급진적인 행동을 권장하는 대신, 마음챙김은 고통의 원인이 거의 전적으로 우리 내면에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삶을 주조하는 정치·경제적 제도는 도외시한 채.’ 당신이 스트레스를 받고 불안감이나 외로움을 느낀다면, 그것은 고용자의 잘못이 아니었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조용한 방에 앉아 호흡에 집중하는 것이 전부였다. ‘회복력 훈련 프로그램’은 시간과 에너지를 지나치게 요구하는 사측의 입장을 수용하도록 직원을 설득하는 수단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노동자에게 굴복을 강요하는, 가장 해로운 의미의 은거였다.
--- 「여덟 | 게임중독과 실리콘밸리의 명상」 중에서
“사람들이 정신질환자를 바라보는 방식은 크게 바뀌었습니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묻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묻기 시작했어요. 미친 듯 보이는 행동도 그 사람에게 벌어진 일을 고려하면 이해된다는 거지요.” 게슈탈트 치료나 위빠사나 명상, 신성과의 만남을 준비하는 기독교식 묵상 등과 마찬가지로, 이 치료의 목적 역시 명료하고 왜곡 없는 시각으로 볼 수 있도록 장애물을 마주 보고 제거해 나가는 데에 있었다. “외부 사람들은 이곳 거주자들이 현실을 회피하려 한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은거 생활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나는 내 병을 겪어내기 위해 이곳에 왔어’라고 생각합니다. 이곳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다 보면, 거주자는 자기가 하는 행동과 스스로 자신의 어려움을 영속시키는 방식을 아주 분명하게 이해하게 됩니다. 이것은 삶으로부터의 은거가 아니라, 삶으로의 은거입니다.”
--- 「아홉 | 위험한 은거」 중에서
돔 에릭 바든은 신을 인식하는 것에 관해 ‘실행되기만을 기다리는 내장된 운영체제’라고 묘사했다. 고요함에 관한 텐진 빠모의 견해도 비슷했다. ‘우리가 그것을 향해 스스로를 열어젖히기만 하면 그것은 항상 여기에 우리 모두를 위해 존재하고 있다.’ 불교도는, 동굴에서 보내는 12년이든 비구니 사원에서 보내는 20년이든, 영적 수행을 심화하는 모든 위대한 노력의 동기가 다른 사람을 돕고자 하는 압도적인 충동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지혜를 얻으려 애쓰는 것은 결국 다른 사람들에게 보시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지각 있는 존재를 향한 연민이다.
--- 「열 | 세상 끝에 지은 집」 중에서
특정한 은거가 어떤 종류에 속하는지는 은거자의 태도에 달렸다.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충동과 연관된 열린 은거와 어둠 속으로 더 깊이 숨어들고자 하는 충동과 관계된 닫힌 은거, 두 유형으로 구분한다. 한적한 장소는 두 유형에 모두 적합하지만, 은거는 수도원이나 쇼핑몰, 동굴, 길거리 등 모든 장소에서 가능하다. 은거는 장소가 아닌 정신 상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행복이나 충족감을 얻고자 한다면 은거를 긍정적인 용어로, 즉 삶을 회피하는 은거가 아닌 삶을 향해 나아가는 은거로 정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현존하기 위한 전제 조건인 깨어 있는 삶을 확립할 수도 있다.
--- 「열 | 세상 끝에 지은 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