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환자의 말에 귀기울여주는 몇몇 프랑스인 의사에게 내가 죽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설득해보려 했다. 그중에 단 한 명만이 비슷하게나마 여지를 남겼다. 도와줄 만한 동료 의사가 있을 것 같다고, 연락해보겠다고…… 물어보고 나서 부탁해야 한다고……. 말꼬리가 흐려졌다. 요컨대 의사는 일단 나를 진정시키고 기다리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의사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이 대화가 끝나자마자 의사는 치료를 해야 한다며 나에게 지루한 설교를 늘어놓았다.
다시 원점이었다.
나는 그 의사를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의사의 반응을 이해한다. 무엇 때문에 이름 없는 환자 한 명을 위해 의사로서 자신의 인생을 걸어야 하겠는가? 프랑스에서 안락사를 행한다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인 것이 사실이다. 그 의사는 자신의 직업과 명예를 모두 잃을 수도 있다. --- p. 53
남편의 여동생 안느 부부가 나를 찾아왔을 때가 생각난다. 나는 시누이 안느를 좋아한다. 우리는 세대도 비슷하고 서로 잘 통했다. 내가 아프면서부터 안느는 늘 내 안부를 물었다.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지난 9월 초 어느 날 오후, 안느 부부가 안시Annecy 호수에 갔다가 오는 길에 솔스 성에 들렀다. 화창한 날씨여서 우리는 바깥에서 점심을 먹으며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 아이들, 장래의 일, 여름휴가 따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아프다는 것을 잊어버릴 만큼, 예전의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이 한나절을 보냈다. 하지만 헤어지는 순간만큼은 힘이 들었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 이제 우리 마지막으로 보는 거네요.” 안느와 안느의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 있었다.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안느와 나는 서로 부둥켜안았다.
병문안은 대개 이렇게 눈물로 끝이 났다. 나는 가족이나 친구들을 만나는 것이 좋지만, 그것은 동시에 가슴이 찢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 p. 56
마지막 몇 주는 따로 치더라도, 여섯 달 동안 마리가 겪은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그 고통은 ‘거의 참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늘 통증이 있었지만, 특히 아침에 깰 때 부종이 뇌를 압박해 더욱 고통스러워했다. 또 마리는 간헐적으로 찾아왔다가 잦아들기를 반복하는 극심한 두통도 느꼈다. 그러한 격통은 3분 정도 후면 말끔히 사라졌지만, 마치 몇 시간이나 계속되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그래서 마리는 약의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 채 돌리프란을 한 줌씩 집어삼켰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마리가 내 손을 슬며시 잡는 것 같다. “여보, 그 정도는 아니었어요!” --- p. 60
나는 불치 선고를 받은 환자들에게 강도 높은 항암치료법을 처방하는 것이 얼마나 소용없는 일인지 의사들이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왜 그들이 불가능한 치유의 헛된 희망을 퍼뜨리면서 환자들에게 진실을 알려주지 않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저희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곧 나아지실 거예요!” 이 말을 얼마나 여러 번 들었던가! 프랑스에서는 어떤 의사도 내 병은 치료할 수 없다고 솔직하게 말한 적이 없다. 그들은 모두 나를 치료하기를 원했다! 내가 모든 치료를 거부한다고 말하자, 몇몇 의사는 나를 거의 미친 사람 취급을 했다. --- p. 64
벨기에에서는 2002년 9월에 몇 가지 세부조항을 조건으로 안락사가 합법화되었다. 안락사는 “환자의 요청에 의해 환자가 의도적으로 목숨을 끊을 수 있도록 제삼자가 시행하는 행위”로 규정되었다. 안락사를 시행하는 의사는 환자의 상태(참을 수 없는 통증, 개선의 전망이 없는 경우 등)와 절차(환자의 인지 여부, 동료 의사의 자문 등)에 대해 몇 가지 규정을 지켜야 한다.
이 법은 안락사의 관리규정을 제도화한 것이다. 안락사를 시행하는 모든 의사는 보고서를 작성해서 특별위원회에 제출해야 한다. 의사와 법조인, 윤리 문제 전문가들로 구성된 이 위원회는 안락사가 법에 규정된 조건에 따라 시행되었는지를 확인한다. --- p. 147
“어쨌든 저는 곧 죽게 될 거예요. 그렇다면 사랑하는 사람들 앞에서 육체적으로도 품위를 지키며 평화롭게 떠나는 편을 택하고 싶어요. 그들이 나를 사경을 헤매는 환자의 모습이 아니라 지난 일평생 살아온 모습 그대로 아내로서, 엄마로서 추억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어요. 저 역시 사랑하는 사람들 곁을 떠나고 싶지 않지만, 모든 것을 두고 떠나야 하는 순간이라면 저 자신의 모습을 지키는 것이 제 권리라고 생각해요!”
그때까지 베르트랑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눈물만 글썽였다. 의사 T씨는 이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남편에게 물었다. 베르트랑은 주저 없이 우리가 겪은 끔찍한 시간들을 이야기해주었고, 내 의견을 끝까지 지지한다고 말했다. --- p. 175
사진액자를 파는 가게를 지나면서 마리가 나에게 말했다. “저기, 액자 사러 가요! 내 사진을 담을 액자를 사야겠어요. 아이들이 나를 추억할 수 있게 액자를 만들어주고 싶어요.” 마리의 싸움은 이제 거의 막바지에 이른 듯했다. 어쨌든 마리는 평화로운 죽음에 이를 기회를 얻었다.
8월 초에 우리는 의사 T씨를 다시 만났다. “밤이든 낮이든 전화하세요.” 휴대전화 번호를 건네며 그가 말했다. “프랑스 중부로 휴가를 갑니다. 혹시 제가 못 가게 되더라도, 제 동료 의사가 갈 겁니다. 필요한 서류는 그분이 가지고 있어요.”
그 후 마리는 ‘좋은 휴가’를 보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즐기려고 노력한 것만큼은 사실이다.
마리의 마음속 고통은 줄어들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