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문제에 접근할 때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는 철학자는 거의 없다. 모든 예술철학은 철학과 예술 사이에 존재하는 깊은 긴장 관계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 철학과 교육을 담당하는 국가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진리였다. 베르하르트 립(Berhard Lypp)은 역사적으로 볼 때 예술과 철학의 관계는 철학의 “전체주의적 오만”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철학은 자기가 독재적으로 운영하는 담론의 우주에서 예술을 추방했다. 이것은 순수하고 절대적인 진리의 미명하에 그리고 철학만이 숭배할 수 있는 (지의) 여신을 빙자하며 일어났다. 이러한 기치 아래 포진한 철학은 주변을 공포와 경악으로 몰아넣었다. 진리를 사랑하는 철학은 자기 누이인 예술이 저항할 수 없게 여러 가지 논거를 생각해 냈다. 물론 이것은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싸움을 멈추면 패자가 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낸 이성의 간계가 아니다. 철학은 자신의 사유 능력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지만, 예술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강요이자 이와 궤를 같이하는 독선이다.”
--- p.14, 「Chapter 1 예술철학과 모더니즘 이론」 중에서
“아름다운 대상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취미가 필요하지만 아름다운 예술, 즉 아름다운 대상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천재가 필요하다.” 칸트는 아름다운 예술이 천재의 예술이라는 점을 의심하지 않았다. 물론 “아름다운 예술”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때는 주의가 필요하다. 아름다운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아름다운 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답게 표현하는 것이다. 칸트의 말을 빌리자면 “자연미는 아름다운 사물이며, 예술미는 사물을 아름답게 표상하는 것이다”. 이 세밀한 구분은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지나침이 없다.
--- p.27, 「Chapter 2 칸트와 미학의 정초」 중에서
보편적 진리의 표현과 관철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다시 말해 보편 진리의 “최고 규정(hochste Bestimmung)”의 측면에서 보면 예술은 헤겔의 유명한 말대로 “우리에게 이미 지나간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로써 예술은 “참된 진리와 생명력을 잃었으며, 현실 속에서 자신의 필연성을 주장하는 대신 우리의 표상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런 의미에서, 오직 이런 의미에서 예술은 헤겔에게 종말을 고한 것이다.
--- p.40, 「Chapter 3 헤겔과 예술의 종말」 중에서
키르케고르에게 명성을 가져다 준 처녀작 『이것이냐 저것이냐(Entweder-oder)』(1843)는 철학적이면서 동시에 문학적인 성격의 작품이다. 여기서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시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시인은 자기 안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감추고 있지만, 한숨과 절규가 터져 나오는 동안에도 아름다운 음악 소리를 내듯이 그렇게 입 모양을 짓는 불행한 사람이다.
--- p.57, 「Chapter 5 유혹과 미적 실존」 중에서
현대 예술철학에서 쇼펜하우어가 차지하는 의미는 좀 더 광범위하고 중요한 차원을 갖는다. “19세기 고전 미학에서 쇼펜하우어의 미학만큼 20세기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영향의 측면에서 볼 때 그의 미학에 필적할 만한 것은 없다.” 울리히 포타스트(Ulrich Pothast)의 이 놀라운 테제는 쇼펜하우어 미학의 두 가지 특별한 성격에 근거를 두고 있다. 첫째, “예술은 철학보다 더 형이상학적 우위”에 있으며, 둘째, “예술가의 의식을 위해 가장 먼저 전제되어야 하는 조건이 시간, 공간, 자아의 해체”라는 점이다.
--- p.71, 「Chapter 6 마취와 위대한 도취」 중에서
소설을 망라한 현대 예술의 내적 형식은 루카치의 말을 빌리자면 “문제적 개인이 자신을 찾아 떠나는 여정이다. 또한 이것은 그저 존재하지만 그 자체가 이질적이고 개인에게는 무의미한 현실에 우울하게 갇혀 있다가 명료한 자기 인식의 길로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 인식은 어떠한 위로와 희망도 마련해 놓고 있지 않다. 루카치의 유명한 표현에 따르면 소설의 형식은 그 어떤 것과 달리 인간의 “초월적 실향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소설은 “신이 떠나버린 세계의 서사시”이며, “의미가 현실을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의미가 없으면 현실은 본질 없는 무로 해체될 것”이라는 통찰을 담고 있다.
--- p.97, 「Chapter 7 모더니즘 미학」 중에서
베냐민에 따르면 아우라의 파괴는 현재 시간과 현재 장소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최대 생산력을 발휘한다. 동일한 영화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상영될 수 있다는 것은 관객의 수용 태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영화만의 고유한 수용층, 즉 대중을 만들어낸다. 전통적 현대 예술에 대해서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는 대중들도 영화에 대해서만은 거의 전문가 수준으로 통달한다. “예술 작품의 기술복제는 예술을 대하는 대중의 태도를 바꾼다. 예를 들어 피카소의 그림을 보며 보수적 입장을 지녔던 대중도 채플린이 나온 영화를 보면서 세상에서 가장 진보적인 입장으로 변한다.”
--- p.111, 「Chapter 9 발터 베냐민과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 중에서
텔레비전은 시청자가 원하건 원치 않건 그를 관음증 환자로 만든다. 넘쳐흐르는 영상의 홍수에 그 누구도 관음증적으로 반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자주 토론되는 리얼리티 텔레비전(Reality-TV)이라는 포맷은 이런 관점에서 텔레비전의 본질을 그대로 보여주는 형식이다. 심지어 이 포맷의 발전은 관음증의 이면, 즉 노출증이 들어올 새로운 여지를 터주기도 한다. 안더스에 따르면 텔레비전을 통해 대립된 것들이 친숙화됨으로써, 즉 거리감 없는 관음증과 거리감 없는 우정이 혼합됨으로써 ― 이는 유아 정신병리학에서 매우 잘 알려진 현상이다 ― 텔레비전 화면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은 고유한 의미를 상실하고 중립화된다. 그것들은 서로 상대방을 상쇄시킨다. 하지만 이것이 텔레비전이 이제 영향력을 잃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 p.123, 「Chapter 10 매체이론으로서 예술론」 중에서
이로써 코페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요소도 다루어진다. 즉, 욕구 표현 화법은 작품이고 텍스트다. 하지만 누가 이것을 통해 자기 욕구를 표현하는가? 이 당혹감이 전달되는 장소에서 당혹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생산 행위는 욕구 표현의 고유한 활동이라는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예술가와 수용자 사이의 경계는 늘 불분명하다. 그뿐만 아니라 젤은 창조적 생산과 수동적 수용 사이의 이 관례적 차이를 없앨 수 있기를 바랐다. “미적 생산물이 심히 불쾌할 정도로 아류적일 수 있고, 미적 지각 행위가 창조적일 수 있다는 점을 제외하더라도 미적 행위의 합리성은 생산이나 수용이 아니라 일정한 대상을 지각해 다루는 구조 속에서 찾아야 한다. 이런 한에서만 미적 행위는 철저하게 심미적이다.”
--- p.155, 「Chapter 12 예술의 전복성에 관하여」 중에서
비록 전체성이 이데올로기라는 베일을 쓰고 있다고 하지만, 제들마이어는 하나의 통일된 전체성으로 체계화할 수 있는 예술 개념이 현대 예술에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여하튼 제들마이어는 순수 예술이라는 이념 그 자체는 분명히 인간에 대한 조직적 적대감을 표현한 것이라고 일관되게 비판한다. “예술의 가치를 평가하는 데는 ‘순수하게’ 예술적인 척도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인간적인 것(그것 때문에 예술은 오직 정당성을 얻는다)을 도외시한 이른바 ‘순수’ 예술적인 척도는 진정한 예술의 척도가 아니라 단지 미적인 척도일 뿐이다. 순전히 미적인 척도만 중시하는 것 자체가 이 시대가 비인간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런 생각은 인간을 고려하지 않은 채 그 자체로 자족하는 예술 작품의 자율성에 대한 선언, 즉 예술을 위한 예술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 p.185~186, 「Chapter 14 현대 예술에 대한 문화보수적 비판」 중에서
그로이스의 성찰에서 끌어낼 수 있는 중요한 결론은 어떤 물건이 경계를 넘어가 그곳에서 아카이브 보존, 즉 문화적 인정을 통해 합법화된다면 그것의 원래 성격을 상실한다는 것이다. 뒤샹의 변기가 문화 담론의 대상이 되는 순간, 그것은 위생학적 성찰의 대상이 되기를 중단한다. 세속적 현실의 요구나 희망 그리고 체험이 문화 아카이브로 전이되는 순간, 그것은 세속적 위상이나 원래 의도를 상실한다.
--- p.218, 「Chapter 16 새로움에 관한 이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