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천공술에 관한 연구는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문헌 사료가 히포크라테스 학파의 저자가 쓴 『머리 부상에 대하여』와 켈수스의 『의학에 관하여』 정도에 짧게 있는 정도이고, 남아 있는 고고학 사료도 많지 않거니와 의료 도구도 일반 도구와 혼동될 정도로 전문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당대의 의사들이 천공술을 행한 것은 확실하며, 그들의 치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의료 도구에 관한 이해가 필수다. 그러나 제한된 사료만 가지고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다. 우리는 새로운 시도를 통해 고대의 의료 도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장에서 바로 이러한 시도를 해 보았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사용한 드릴과 끌은 조각에서도 사용되었고, 두개골 천공 등 의료적 목적으로도 사용되었다. 그 모습이 조금 달랐을 수도 있지만, 아마도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유사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전문가를 초청하는 문화가 일반적이던 기원전 5-4세기에 기술의 교류 역시 활발했을 것이며, 의사들도 조각가들의 발전된 기술을 받아들였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문헌적 증거는 없지만, 남아 있는 고고학적 사료로부터 의사들이 영감을 받았을 법한 요소들을 많이 찾을 수 있고, 그 기술이 천공술에 활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톱니를 적용하여 도구의 효력을 강화한 것이나, 드릴을 사용하여 손상을 최소화하는 것 등이 그 예이다. 의사들의 기술을 조각가들이 배웠을 가능성은 조금 더 낮다. 조각가들이 수술장면을 보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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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대유행과 함께 QR 코드는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일상에 들어왔다. 원할 때 이용하고 원하지 않을 때는 외면해도 되는 기술인 QR 코드가, 전염병의 시대에는 원하지 않아도 사용할 수밖에 없는 기술로 다가왔다. 나의 개인정보를 QR 코드에 담아 제공해야만 그나마 원하는 일상을 누릴 수 있었기에, QR 코드는 일견 강제적인 기술로 인식되었다. 게다가 굳이 QR 코드를 대신할 여러 방법(수기명부 작성, 안심전화번호, 문자메시지 체크인, 종이증명서, 접종증명스티커 등)이 존재했기에, QR 코드는 원하던 때와 장소에서 이용하던 과거와는 다른 이미지를 부여받았다. 심지어 백신접종이 반강제적으로 요구되고(방역패스) 이를 거부하면 명백한 불이익을 받을 것처럼 여겨지며 찬반 논란이 치열하던 상황에서, 이런 백신접종을 증명하는 기술로서 QR 코드는 모바일 세상의 편리함을 제공하는 예전 이미지와는 달랐다. 하물며 그 QR 코드에 내가 원하는 타자의 정보가 아니라 나의 정보를 담아야 한다면, 그리고 그 정보가 어떻게 보호될지 일말의 의구심이라도 든다면,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전염병의 시대 QR 코드는 유통 혁신을 이끌고 스마트폰과 무선인터넷 환경의 중심이었던 과거와는 다른 모습의 기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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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은 인류학자가 직접 연구 대상이 있는 현지에 가서 연구 대상들과 어울리면서 참여 관찰을 통해 그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의 생활 방식, 제도, 사회문화의 심층 구조를 파악하는 학문이다. 여기서 연구 대상이 되는 ‘그들’은 단지 인간 행위자뿐 아니라 언어, 도구, 동물 등 다양한 비인간 행위자들도 포함될 수 있다. 이러한 연구 방식은 연구 주체와 대상 간의 관계를 성찰적, 대칭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데까지 나아갔으며, 탈서구중심주의에 대한 깊은 고민을 진행하고 있다. 인류학의 이러한 관점은 서구 중심의 인간주의, 인류중심주의, 이원론에서 탈피하는 데 큰 기여를 할 수 있다. 또한 인류학의 대칭적 관점은 과학/비과학, 근대/전근대, 서구/비서구의 이분법 속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한의학의 사유를 포스트휴머니즘 논의와 연결시키는 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 p.103
앞으로 인공지능은 그 목적에 걸맞게 점점 더 인간화될 것이고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은 그만큼 더 줄어들지도 모른다. 혹은 반대로 수준 높은 AI에 의해 인간의 권능이 더 공고해질 수도 있다. 어떠한 방향이든 기술 발전은 가속화될 것이다. 인간은 오랜 세월 동안 대화라는 형식으로 상호작용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아 왔다. 이제는 인간이 가장 취약한 의료적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AI와 상호작용할 시점에 이르렀다. 과학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는 4차산업혁명 시대, 인간 중심의 의료는 환자의 요구와 필요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를 기술이 뒷받침할 수 있을 때 가능해질 것이다.
--- p.139
노인 돌봄의 대상, 혹은 만성질환자들이나 인지장애를 겪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정확한 정보를 발견하는 보조자보다, 기존에 자신이 갖고 있던 정보를 기억하고 있다가 필요할 때 내놓는 보조자가 필요하다. 건강 정보는 물론, 개인과 가족의 정보들을 인공지능에게 학습시켜 놓았다가 필요한 정보를 내놓는 일이라면, 현재의 챗GPT도 충분히 해낼 수 있다. 일정한 수량의 논문이나 책 내용 안에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내는 것은 큰 오류 없이 답변이 가능하다. 한정된 정보 안에서의 요약과 검색은 ‘환각’의 위험 없이 활용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만 개인정보에 유출이나 악용에 대한 위험성이 있을 수 있다. 돌봄 로봇이나 돌봄형 인공지능 스피커를 네트워크에 연결하더라도, 정보의 입력(input)만 가능하고 외부 인출(output)은 불가능하도록 한다든지, 한정적인 경우에만 네트워크로 외부로 연결하고 평상시에는 가정이나 보호자, 사회복지 관계자들과의 내부 인트라넷에만 연결하도록 한다면 그러한 불안감도 덜어낼 수 있다.
--- p.179
한국의 돌봄 로봇 정책들을 살펴보면 가장 근본적인 물음이 제기되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는 정부 정책을 수립하는 과정에서뿐만 아니라 학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돌봄 공백의 문제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인 탓인지, 돌봄 로봇의 도입은 당연히 해야 할 바인 것처럼 전제된다. 돌봄 로봇의 도입 자체에 대한 질문은 거의 제기된 바 없다. 가령 식사 보조 로봇을 사용할 때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점과 그릇이나 숟가락의 크기 등 로봇의 개선 사항에 대해서는 연구가 있지만, 식사 보조 로봇을 사용하는 것이 적합한 일인지, 이것을 사용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어떤 윤리적 문제가 있는지 등에 대해서는 학계에서조차 관심이 없다. 돌봄 로봇의 윤리적 문제를 다룬 배영현, 이은영, 최영림 등의 아주 드문 예외가 있을 뿐이다.(배영현 2022, 이은영 2022, 최영림 외 2023) 그러나 돌봄은 그 자체로 윤리적 행위이다. 자율성이 낮은 이승 보조, 욕창예방, 배설보조, 식사보조 로봇에서부터 상대적으로 자율성이 높은 AI돌봄 로봇에 이르기까지, 돌봄 로봇이 수행하는 모든 역할들에는 윤리적 결과가 필연적으로 뒤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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