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원천 봉쇄된 도축장에 ‘침입’하기란 만만찮은 일이다. 도축장 담장이 여느 사회적 장벽보다 높기 때문이다. 업주들은 ‘위장취업’ 조항을 방패삼아 도축장에 잠입하려는 모든 시도를 막아낸다. 한마디로 도축장의 벽은 특별한 법적 보호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도축장 내부의 작업 또한 일반적 고용 형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금지 및 제재 조항을 갖고 있다. 도축장 내부 실태에 관한 사진 및 음성 자료의 제작, 소유 배포를 금지한 것은 그런 자료들이 여타 기록물들과 다르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것과 같다. 특별한 사회적 의미를 가진 도축장의 벽, 내부 작업, 기록물 등은 이렇듯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다. --- pp. 17~18
엘리아스에 의하면 수세기에 걸쳐 식탁에 올라올 수 있는 고기의 부위는 점점 줄어들었다. 동물의 발과 머리 등 그 몸뚱이를 떠올리게 하는 부위들이 식용부적합 판정을 받았던 것이다. 도축 장면을 연상시킬 수 있는 날카로운 칼은 무딘 것으로 교체되었다. 동물의 사체를 먹고 있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 모든 도구는 최대한 배제되었다. 오늘날 스테이크를 먹을 때 사체를 뜯어먹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모두 요리 기술과 육가공 방법이 발달한 덕분이다. --- p. 20
2004년 6월부터 12월까지 약 5개월 반 동안 나는 오마하의 한 도축장에서 일했다. 킬 플로어(kill floor)에서 평일 아침 5~7시부터 오후 4시~6시 30분까지 하루 9~12시간 근무했다. 나는 취직할 때 내가 정치학 교수란 사실도, 도축장에 관한 책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도 알리지 않았다. 맨 처음 나는 냉각실(Cooler)에서 시간당 8달러 50센트를 받고 간 매다는 일을 했다. 그러고 나서 살아있는 소들을 ‘노킹박스(Knocking Box)’ 안으로 이동시키는 활송 장치 앞으로 자리를 옮겨 시간당 9달러 50센트를 받고 일했다. 활송 장치 앞에서 나는 킬 플로어의 면면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운 좋게도 짧은 시간 내에 여러 가지 일을 두루 경험하며 거리두기와 감추기의 작동 방식을 자세히 살필 수 있었던 것이다. --- p. 24
내가 일했던 도축장은 지금도 성업 중이다. 노동자 약 800여 명이 노조 없이 일하고 있다. 그들 대다수는 중남미, 동남아시아, 동아프리카에서 건너온 이민자 또는 난민이다. 도축장에서 생산되는 소고기는 미국과 해외에서 유통되는데 연간 매출액이 8억 2,000만 달러에 육박한다. 생산량으로 볼 때 미국 내 도축 및 소고기 가공시설 상위 10위권에 꼽힌다. 도축 속도는 한 시간에 약 300마리, 하루에 2,200~2,500마리 정도다. 일주일이면 약 1만 마리, 연간 50만 마리 이상이 죽어나간다. --- p. 26~27
철조망 주변을 빙빙 돌던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도축장을 방문하기 전 내가 상상했던 그 어떤 것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핏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뚜껑 없는 배수구, 썩어터진 신장과 폐 등이 둥둥 떠다니는 오물통, 지옥도를 연상하게 하는 동물들의 울음소리, 피로 물든 흰색 옷을 입은 근육질의 인부들, 커다란 식칼을 들고 뽐내듯 돌아다니는 푸주한 등등. 눈을 씻고 찾아봐도 이들은 없었다. 너무나 평범한 풍경만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아무 특징도 없는 이 도축장은 21세기 미국 도시 어디에나 존재하는 상업지구 내의 보통 회사처럼 보였다. --- p. 32
철벽 너머 세상이 어쩌다 한 번 공개된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두 목소리를 연상하게 한다. “보지 마. 너는 볼 수 없어. 보아서는 안 돼. 볼 필요 없어!” 철벽의 목소리다. “봐. 볼 수 있어. 얼마든지 보라고. 볼 필요가 있어!” 함석문과 회의실 창문의 목소리다. 프런트 오피스 직원들, 소를 죽이는 사람 덕분에 소고기를 먹고 있으면서도 도살행위와는 격리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은 보라는 말과 보지 말라는 말이 뒤섞인 이상야릇한 메아리를 듣게 되리라. 현대사회의 모든 격리와 중개 과정에는 이와 같은 모순된 목소리가 난무하고 있다. --- pp. 37~38
외부인이 운 좋게 냉각실 입구까지 올 수 있다면 충격적인 장면에 입이 절로 벌어질 것이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이분체와 검붉은 간이 줄줄이 콘크리트 계단을 내려오는 광경…….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짐승의 몸통과 그것에서 분리된 혀, 꼬리 등이 나란히 매달려 있다. 아래쪽에 놓인 수레들에는 검붉은 간들이 한가득 실려 있다. 간이 갈고리에 매달릴 때 생긴 상처에서는 검붉은 피가 흘러나온다. 냉각실은 몸통도 아니고 몸통 이외의 것도 아닌 어떤 것, 전체도 아니고 완전히 해체된 부분도 아닌 어떤 것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점이지대다. 이 꼬리와 이 몸통, 저 혓바닥과 저 간은 분명 다른 소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이들 꼬리와 혓바닥을 한 줄로 세워놓거나, 한데 모아놓으면 엄청난 분량이 되어서 원래 그 꼬리와 혓바닥이 어느 소에서 나왔는지 분간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 p. 42
그림들을 보면 도축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800여 명 가운데 살아있는 소를 마주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인지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도살에 적극 가담하거나 도축행위를 볼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다. 킬 플로어가 삶과 죽음의 공간으로 구분되었음을 상기할 때 도축장 인부 대다수는 죽음의 공간에서 일하는 셈이다. 극소수의 사람들만 살아있는 소나 죽어가는 소를 대면한다. 그리고 그보다 더 소수의 사람만이 도륙행위에 가담한다. 이렇게 소는 몇 단계를 거치며 서서히 죽어간다. 그리고 각각의 단계는 다른 작업을 맡은 인부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 킬 플로어는 도축행위를 은폐하고 격리하기 위해 도축장의 다른 공간들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어 있는 것이다. --- p. 69
소의 치아를 살피는 노동자(원48, 49)는 다운 풀러 옆 청결한 쪽에 서 있다. 우해면양뇌증BSE, 흔히 ‘광우병’이라 불리는 것이 미국에서 처음 발생한 이후 농무부는 미국 전역의 모든 도축장에서 광우병 위험이 큰 30개월 이상 소를 별도로 처리하고 판매하도록 조치하고 있다. 킬 플로어에서는 고위험군 소를 흔히 ‘30개월 소’라고 약칭한다. --- p. 87
구강검사는 쉽고 간단해 보인다. 파란색 안전모를 쓴 노동자들은 무전기로 킬 플로어 상황을 파악한 뒤 ‘30개월 소’가 너무 많아 작업 속도가 늦어질 것 같으면, 라인의 속도를 조금 늦춰달라고 현장 책임자에게 요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작업의 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경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소의 치아 상태만으로 30개월 여부를 판별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빨이 부서져 나갔거나 토사물, 소화되다가 만 음식, 피 등으로 입안이 엉망진창이라 이빨이 잘 보이지 않는 일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루 8~9시간 동안 12초 간격으로 소 한 마리씩을 검사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자칫하면 영구치를 여러 개 보유한 소를 실수로 놓칠 수도 있다. 만약 30개월 소를 골라내지 못한 채 라인에 보냈다가 농무부 검사관에게 적발되면 노동자는 해고될지도 모른다. 운이 좋다면 3일 근신 혹은 인사이동 당할 것이다.
--- p. 87~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