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서면 멀어지고, 멀어지면 다시 다가서는 인간사회의 밀당과는 조금 다른 의미지만, 거리의 ‘재설정’과 ‘리셋’은 인간이나 동물 모두에게 생존이라는 극한의 상황과도 맞닿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적절한 거리’는 ‘적절한 균형’과 동의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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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힘들 때 시장을 한번 가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왜 하필 시장일까? 북적이는 시장통은 삶의 생존 본능이 꿈틀거리는 상징적인 곳이다. 여기저기서 살겠다고, 단돈 백 원이라도 더 받고 단돈 십 원이라도 더 깎겠다고 흥정하며 질펀한 삶의 희로애락이 넘쳐나는 곳, 그곳이 바로 시장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장이 아니라 ‘시장 바닥’이란 속칭을 더 즐겨 사용한다. 그야말로 ‘바닥을 치는’ 이런 곳에 가면 꺼져 가는 삶의 욕망도 다시 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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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안방에서도 게임을 즐기듯 타국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실시간으로 ‘감상’할 수 있다. 현장에서 벌어지는 아비규환의 고통과 비극은 우리 귀에, 우리 시선에 ‘살아서’ 도달하지 않는다. 재난 재해 뉴스의 시청률은 일반 뉴스보다 시청률이 높다. 타국에서 벌어지는 전쟁, 대형 산불이나 지진, 해일이나 폭우 등 각종 자연재해로 인한 대규모 인명 피해의 발생은 사람들을 TV 앞으로 끌어모으는 힘을 가진다. 부정적인 힘이지만, 미디어 입장에서는 꽤 괜찮은 사업 소재다. “피가 흐르면 앞쪽에 실어라”라는 말은 싸구려 저널리즘만의 모토가 아니다. 현대 미디어의 잔인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속성이자 생존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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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같은 일을 무한 반복해야 하는 천형(天刑)을 받은 시시포스가 불행한 이유는 어제와 다름없는 오늘, 오늘과 다름없는 내일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시시포스에게 오늘은 파란 공을, 내일은 노란 공을 들어 올리라고 했다면 아마도 덜 불행해했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서 시시포스의 불행은 돌을 들어 올리는 힘든 노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견딜 수 없는 지루함에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시시포스는 불행의 근원인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즉 ‘변화’를 위해 내일은 오늘보다 더 무거운 돌을 들어 올릴 의사가 있는 걸까? 러셀은 “그렇다”라고 답하고 파스칼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러한 결정이 또 다른 불행을 낳는다고 경고한다. 물론 정답은 시시포스 자신만이 알고 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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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 투하의 최종 결정은 백악관의 오벌 오피스에서 이뤄졌고, 킬링필드의 대규모 학살 결정은 폴 포트의 책상 위에서였다. 그들은 안전하고 안락한 사무실에서, 자신의 옷깃에 피 한 방울 튀기지 않을 정도의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며 역사에 남을 대규모 살육을 결정했다. 전자는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서”, 후자는 “이상사회 건설을 위해서”라는 명분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어떤 경우이건 간에 이러한 심리적, 물리적 거리감은 타인에 고통을 주는 행위에 대해서 느끼는 죄책감을 감소시키는 경향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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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를 이해하려면, 니체라는 인간 존재의 ‘원액’을 마셔야 한다. 하지만 잘못하면 심각한 손상을 입을 수 있다. 그래서 혹자는 원액이 아닌 희석을 원하지만, 불가피하게 왜곡이 뒤따른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철학적 틀 안에서 니체를 ‘소비’했고 질 들뢰즈는 지나친 호의에 매몰돼 니체가 버린 오물을 ‘세탁’하기에 급급했다. 누구도 니체의 생각을 객관적으로 읽어 냈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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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외친 부처는 그 지독한 고독마저도 실존하는 개인이 짊어질 몫이라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는 부처는 극강(極强)의 실존주의자다. 부처에게는 의미가 있던 자리도, 의미가 떠난 빈자리도, 아니 애초에 찾아야 할 의미 자체도 모두 무(無)다. 결국 인생이 무의미한 것은 인생의 의미를 찾기 때문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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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숀은 현대예술이 저지르는 최대의 죄악은 관객을 무시하거나 심지어 경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현대예술계가 가하는 전 세계적인 겁주기와 테러의 무거운 짐은 평범한 관객들의 빈약한 어깨 위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 벌거벗은 임금님이 거리를 행진할 때, 환호하는 자들은 이미 진실을 알고 있다. 다만 그 진실을 말할 용기가 부족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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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재로 돌아간 호킹은 천국이 아닌 어디로 갔을까? 만유인력을 통해 놀라운 신의 존재를 확인한 뉴턴과 생명의 기원을 통해 천지창조의 비밀을 알아 버린 다윈 사이에 누워 있는 호킹은 또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쩌면 호킹은 이런 종류의 질문에 화를 내면 다시 물을 것이다. “이봐, 질문 자체가 틀렸네. 애초에 없는 곳을 어찌 갈 수 있겠나?”라고 말이다. 호킹의 생각이 옳다면, 그는 영원한 ‘없음’의 세계에 잠들었을 것이다. ‘잃어버린 천국’은 다시 살아 있는 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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