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집을 비운 게 언제쯤일까 생각한다. 언제쯤이면 다시 집으로 돌아올까 생각한다. 별안간 오싹 소름이 돋는다. 별 근거는 없지만, 아무래도 생각보다 오래전에 집을 비운 것 같다. 불길한 추측일 뿐이지만, 아무래도 생각보다 오래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눈 가는 곳마다 일상의 흔적들이 가득할수록, 손 가는 구석마다 은원의 냄새가 친숙할수록, 오히려, 알 수 없이 불편하고 불길한 예감이 더욱 거세게 차연을 등 떠밀고 있다. 인정하기 싫지만 이제 어떤 가능성을 사실로 받아들여야 할 것만 같다.
은원이 사라졌다.
은원이 사라졌다.
--- p.17
“문 팀장님 일주일째 결근 중이세요. 연락도 안 되고요. 영문을 모르겠어요. 저희도 걱정이에요.”
“그렇군요. 아아.”
차연이 중얼거린다.
“혹시 여기서, 무슨, 안 좋은…….”
“회사 내부의 무슨 문제 때문에 그러시는 게 아닌지 물으시는 거라면 그런 일은 전혀 없다고 말씀드릴게요. 어쨌거나 그래서 저희들도 이만저만 걱정스럽고 곤란한 상황이 아니에요.”
--- p.20
“만난 지 한 달 정도라면, 두어 달 되는 사이라면, 그렇다면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거야. 반대로, 요컨대 사귄 지 5년이 넘었다면, 7~8년 넘게 사귄 사이라면, 열흘 넘게 연락이 끊기고 도통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황이 걱정스럽기는 할지언정 이렇게나 괴롭고 두렵지는 않았을 거야. 결국은 600일이 문제야.”
“하지만 어째서 600일이…….”
“딱 그 정도거든. 곁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졌을 때, 그보다 짧게 사귀었을 때보다, 그보다 길게 사귀었을 때보다, 딱 괴로워 죽기 좋은 연애 기간. 내 생각이지만.”
--- p.87
“우리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네요. 지금과 비슷한 말을 은원 씨가 했거든요.”
“아, 그래요?”
“하도 느닷없어서, 그게 나한테 하는 말인지도 미처 몰랐지요. 처음에는.”
은원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뭐라고 했는데요.”
“저녁 안 드시나요.”
“응?”
“저녁 안 드시나요.”
--- p.115
“두 사람의 드라마틱한 첫 만남. 역사적인 사건이었어요. 한순간도 놓칠 게 없었어요. 고스란히 기록해두었으니 시간 내서 확인해보세요.”
“나 드라마 안 좋아하는데.”
“드라마가 아니에요.”
“그럼?”
“그 이상이지요. 감정에 대한 문제, 타인에게 반응하고 사고하는 문제, 무엇보다 기억에 대한, 자연스레 형성되는 기억과 만들어진 기억의 차이에 대한 문제, 기억하는 것과 기억하고 있다고 믿는 느낌 사이의 이질성에 대한 문제 등 가히 혁신적인 정보들을 숱하게 얻어낼 수 있었다니까요.”
--- p.117
“어쩌면 그렇게 조목조목 시간순으로 세세한 것까지……. 미리 정리하신 건가요? 나한테 이야기해주려고?”
“잡스러운 것들에 유난히 집착하는 편이거든요. 머릿속에 서랍장이 많이 있어서 그런 것들을 차곡차곡 정리해두는 게 취미죠. 변태처럼.”
“그런 거 같네요, 변태.”
“더 해볼까요? 2021년 9월 19일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몇 번을 만났는지. 어느 날 언제 어디서 만나 그날 하루 뭐 하고 지냈는지. 아니면 2021년 10월 22일부터.”
“2021년 9월 19일? 10월 22일?”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이에요. 우리가 사귀기로 한 날이고.”
--- p.128
“말하자면 저는, 음, 차연이 기억하는 그 사람이 아니에요. 물론 잘 아시겠지만.”
“…….”
“차연과 함께했던 시간들을 기억 못 하는 게 아니라 그런 시간 자체를 경험한 적이 없는 사람이지요. 뭐, 얼굴은 아주 비슷하지만.”
“나도 알아요. 제주도에서…….”
차연이 잠시 말을 멈춘다. 아니다 말하려는 내용을 잠시 놓친다. 잠시 서럽다. 회청색으로 물드는 하늘을 잠시 바라본다.
“제주도 여행에서 돌아오며 마지막으로 헤어졌던 은원, 며칠 전 종로에서 만나 함께 점심을 먹고 차를 마셨던 은원, 그리고 지금 내 앞에 있는 은원이 전혀 다른 은원들이라는 사실을 나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요. 물론 헷갈리지만, 아직도 많이 혼란스럽지만, 은원이 예전의 은원들과 다른 은원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중이에요.”
--- pp.234-2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