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봉지를 손에 쥐고 홀로그램 광고를 바라보던 레오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저 티엔 바이오 주사 한 번이면 할머니를 살릴 수 있다.
‘영원한 삶…….’
2059년 개발된 티엔 바이오는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다는 홍해파리를 활용해 만든 물질로, 병들거나 노화한 세포를 스스로 없애고 새로운 세포를 생성해 인간의 삶을 불멸의 영역까지 끌어 올렸다는 찬사를 받았다.
티엔 바이오 출시 후 5년 동안 세계 노인 비율이 2.5퍼센트나 감소했다. 노인이 청년이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주사 한 개 값이 집 다섯 채만큼 비싸서 부자 노인들만 청년이 될 수 있었지만.
--- pp.7~8
마젠타는 레오보다 키가 조금 컸고, 여자아이 모습을 하고 있었다. 활동가가 마젠타의 머리를 쓰다듬자 마젠타가 고개를 돌려 살짝 웃었다. 웃는 모습이 진짜 사람 같았다.
레오는 마젠타의 이마에서 빛나는 글자 ‘R(알)’을 보며 겨우 정신을 차렸다. 모든 안드로이드는 이마 가운데에 인간과 로봇을 구분하기 위한 표시가 있었다.
이마에 새겨진 ‘R’이라는 글자는 로봇을 의미했고 대체로 로봇의 눈동자와 같은 색깔의 불빛이 들어왔다. 마젠타의 ‘R’은 이름과 어울리는 옅은 자줏빛을 띠고 있었다.
--- p.15
“멋있어. 사람에겐 각기 다른 지문이 있다지? 어떻게 그 많은 인류가 모두 자기만의 문양을 갖고 태어날까? 신비롭고 아름다운 일이야. 그렇지 않니, 레오?”
레오는 고개를 돌려 마젠타를 내려다봤다. 마젠타의 눈빛은 호기심 가득한 고양이 같았다.
“그래서 너도 인간처럼 지문이 있으면 좋겠어?”
“아니. 그건 인간 고유의 것이야. 우리 로봇에겐 시리얼 넘버가 있지. 난 내게 주어진 로봇 넘버를 사랑해.”
--- p.18
마젠타는 엉뚱한 짓의 달인이었다. 자기 부상 호버보드를 타고 자유 시간을 즐기는 안드로이드들과 공터에서 경주를 했고, 간단한 대화만 가능한 청소 로봇을 쫓아다니며 토론을 시도했으며, 로봇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안드로이드의 삶에 관한 인터뷰도 했다. 드론 캅 카메라와 눈 마주치기, 로봇의 역사 빠르게 말하기, 다른 로봇 흉내 내기 같은 취미도 있었다.
마젠타는 언제나 유쾌했고 농담을 좋아했으며 행복을 이야기했다. 레오와 할머니도 서서히 마젠타에게 물들어 갔다. 마젠타와 함께 웃고, 마젠타의 의견을 구하고, 마젠타 이야기에 귀 기울였으며 어느 순간에는 마젠타가 로봇이라는 사실을 잊기도 했다.
--- pp.23~24
13구역 문제아 강태훈. 불량스러운 태도는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었다. 로봇 불법 개조로 청소년 보호소에 들어갔다 나왔다더니 지난주부터 아무 때나 나타나 레오에게 장난을 걸었다.
“형이 싸게 해 준다니까.”
“됐어요. 난 그런 거 안 해요.”
“그런 게 뭔데?”
“그게 뭐든요.”
--- p.28
“그 사람이 말했어. ‘인간이 아름다운 건 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안드로이드와 구분되는 가장 명확한 지점이지요.’”
“아니야, 틀렸어.”
레오 말에 마젠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드로이드한테도 끝이 있잖아. 고장 나거나 수명이 다 되면 기억을 지우고 업그레이드하거나 리셋 하잖아. 그게 안드로이드한테는 끝인 거지. 죽음이야. 그러니까 끝이 있고 없고가 인간하고 다르다는 건 순 억지야.”
레오는 로봇동산에 처박힌 수많은 로봇 부품을 떠올렸다. 어떤 것은 형태가 그대로 보존되어 언뜻 시체 같기도 했다. 더 이상의 업그레이드도 리셋도 불가능한 제품은 해체되고 부서지고 버려졌다. 레오는 인간의 죽음이 안드로이드와 다른 건 조각나는 대신 불태워지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 p.38
‘티엔 바이오’는 나날이 줄어드는 인구 유지를 위해 필요하다!
‘티엔 바이오’는 인류를 살리는 발명품!
뉴스를 보던 레오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찬성. 돈만 있으면 무조건이지.”
자연스러운 삶, 자연스러운 죽음, 자연의 이치
우리는 부품을 갈아 끼우는 안드로이드가 아니다. 인간답게 살자!
마젠타가 뉴스에 나오는 피켓을 보며 생각했다.
‘그럼 안드로이드다운 건 뭘까?’
--- p.40
“할머니는 몸이 안 좋아져서 이제 여기서 일 안 해요. 그런데 누구세요?”
“어머, 날 몰라보는구나? 그럴 만도 하지. 나, 96호 기주 할머니야.”
“예?”
레오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레오 앞에 있는 사람은 누가 봐도 할머니가 아니었다.
‘아, 티엔 바이오를 맞았구나. 그런데 13구역에 살던 기주 할머니가 어떻게 그 비싼 주사를 맞았지?’
--- p.45
마젠타는 저 아래 점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티엔 건물 밖으로 도망치는 것과 소방차 여러 대가 건물로 모여드는 것을 바라보며 하늘을 날았다. 마젠타는 바람을 느끼며, 잠깐이나마 자유롭다고 생각했다.
“시뮬레이션 끝!”
태훈의 외침에 드높은 푸른 하늘도 높이 솟아오른 티엔 건물도 사라졌다. 마젠타는 활짝 펼치고 있던 팔을 접고 브이알 헤드셋을 벗었다. 레오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마젠타를 바라보았다.
--- p.85
“위험할 게 뭐 있냐? 마젠타는 로봇이야, 로봇. 로봇은 겁이 없다고. 사람처럼 높은 데 올라간다고, 날아다닌다고 오줌 싸지 않는단 말이야, 알겠어?”
레오가 마젠타를 바라봤다. 레오와 눈이 마주친 마젠타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맞아. 로봇은 겁이 없어.”
레오는 그런 마젠타가 낯설었다. 그러고 보니 온종일 마젠타가 웃는 얼굴을 보지 못했다. 예전의 마젠타였다면 벌써 백 번은 웃었을 텐데 말이다.
--- pp.86~87
“저기!”
마젠타가 돌아서려는 비비를 붙잡았다.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혹시 꿈꿔 본 적 있어?”
“꿈?”
“응, 사람들이 잘 때 일어나는 현상 말이야. 무의식이나 감정을 반영하고 뇌가 하루 동안 있던 일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다양한 자극이 반영되는 꿈.”
--- p.103
마젠타는 출입구를 향해 타박타박 걸었다. 문 안으로 들어선 마젠타는 바코드 인식기에 손바닥을 올렸다. 문득 사람들이 지문 인식기에 손을 대던 모습이 떠올랐다. 손끝에 각기 다른 문양을 지닌 사람들. 다양한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던 마젠타의 입에서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난 내 로봇 넘버를 사랑해.”
뜬금없는 마젠타의 말에 태훈은 콧방귀를 뀌었다.
--- p.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