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는 전통적으로 '직인 정신(장인 정신)'과 '천하제일주의' 사상이 있다. 이것은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을 통일한 후 전국 시대를 꿰뚫어 왔던 외연적 팽창 에너지를 내연적인 깊이로 치환한 정책에서 비롯되었다. 이 때부터 사농공상이란 기존의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하고 직업의 귀천이 약해졌다. 어떤 분야에서건 최고의 위치에 있는 사람을 존경하는 풍토가 성립된 것이다. 이런 정신이 음악과 영화, 애니메이션 들을 단지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깊게 연구하는 태도로 자연스럽게 이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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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오타쿠 중에도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개중에는 변태라고밖에 해석할 수 없는 사람도, 폭력배로밖에 해석할 수 없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온화한 성격의 사람들이 많다. '열중'은 하지만 '열광'은 하지 않는 온화한 성격의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오타쿠의 지식욕에는 놀라울 점들이 있다. 누가 애니메이션을 이해하기 위해 양자론을 공부하고 생물학을 공부할 것인가. 에반겔리온의 열성적인 팬들 중에는 실제로 성서에서 현대 양자 물리학에 이르기까지 조사하고 공부한 사람들이 수도 없이 존재한다.
오타쿠가 취미에 바치는 열의를 회사 일에 바치면 어떻게 될까. 바로 '일중독'이다. 일본의 현재의 번영을 구축해온 것은 오타쿠가 될 소질과 재능이 있으면서도 될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어쩌면 그들은 '연구 오타쿠', '개발 오타쿠', '회사일 오타쿠'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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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오타쿠란 무엇인가? '오타쿠'가 되기 위해선 전문가를 넘어 비평가적인 시각까지 지녀야 한다. 애정의 대상을 여러 각도의 관계성으로 인식하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오타쿠가 '팬'이나 '마니아'와 다른 점은 바로 이 점에 있다. 일방적으로 애정을 쏟아 붓거나 무작정 데이터를 모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대상을 중심으로 자신과 세상과의 관계를 여러 의미로 재배열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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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에 몰두해서 아침부터 밤까지 게임만 하고 산다면 마니아에 불과할 뿐이다. 오타쿠가 되기 위해서는 게임을 비형할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한다. 전 세계적으로 500만개가 팔린 '파이널 팬터지 7'을 비형할 때, 스토리나 영상 같은 표면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데이터를 읽는 체감 속도의 향상이나 인터페이스의 지고간성 등 시스템까지 언급하지 않으면 '오타쿠'라고 말할 수 없다. 나아가 작자의 의도와 판매 대상을 뚫어 보는 마케팅적 안목도 필요하다. 매킨토시를 만든 애플 컴퓨터, 그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와 스티븐 워즈낵은 일본식으로 말하면 컴퓨터 오타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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