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이 책을 쓸까? … 폭스뉴스 같은 강력한 우파 채널이 진실에는 관심이 없는 선전 나팔수로 타락하는 때에, 진보 언론의 거대한 전투함인 [뉴욕타임스]의 정신적 기류를 왜 우려할까? 트럼프와 공화당이 훨씬 더 나쁘다는 이유로 일부 좌파의 근본주의를 외면하는 것은 태만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 p.17
주장 자체가 아니라 그 주장을 말한 사람의 피부색이나 성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내가 보기에 재앙이다. --- p.20
부루마가 어느 진영에 속하는지 특정하기 어려웠다. 아마도 그래서 파멸에 이르렀는지도 모른다. --- p.32
최근에 ‘혐오 발언’ 또는 ‘상처를 주는 말’의 범위가 점점 더 넓어졌다. … 허용 한계선이 너무 빠르게 바뀌어서 선의를 가진 사람들조차 거의 따라잡을 수가 없다. --- p.51
이런 과잉 덕분에 미국 공화당은 비판적 인종 이론에 반대하는 ‘십자군 운동’을 벌이고, 비판적 인종 이론이 “국가의 심장을 찌르는 행위”라고 쉽게 욕할 수 있었다. --- p.52
하필이면 생각과 의견의 자유로운 교환을 근본으로 여겼던 미국 대학들이 반대파의 입을 막으려는 정치적 행동주의의 시험장이 되었다. 학생들은 더 나은 주장을 펼치려 애쓰는 대신 자신의 세계관 강화에 몰두했고, 대안을 제시하려는 시도를 자신의 정서적 안정과 안전을 공격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 p.71
대학에서 자유로운 의사 표현이 가능하게 도운 것은 특히 좌파였다. 그래서 현재 의견의 통로를 좁히려 애쓰는 사람이 스스로 진보적이라고 여기는 것은 더욱 기이해 보인다. --- p.84
표현의 자유는 언제나 그것 말고는 자신을 방어할 수단이 없는 사람들의 무기였다. 그런 점에서 연사를 명단에서 지우거나 토론을 거부하는 데는 종종 현상 유지의 욕구가 담겨 있다. --- p.84
언론의 미래를 둘러싼 모든 토론에서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은 다양성이다. 그러나 다양성의 표제 아래 거의 포함되지 않는 것이 바로 의견 스펙트럼이다. --- p.111
200년이 넘는 자본주의 역사에서, 진보적 자아상과 철저한 이익 극대화의 결합이 지금처럼 쉬웠던 적이 없었다. --- p.128
이 거대 기업들은 ‘깨어 있음’ 운동을 그들의 사업 기획에 힘들이지 않고 통합할 수 있었다. 외국에서 공정한 노동 조건을 마련하거나 권위적 체제에 저항하는 용기를 내는 것보다 광고에서 성인지 감수성이 높은 언어와 다양성 이미지를 쓰는 것이 확실히 비용이 덜 들었기 때문이다. --- p.132
진보적 프로젝트가 이 선을 넘는 순간, 시민들은 지지를 거둔다. --- p.166
이른바 포용의 언어는 저학력 폭도보다 우월해지는 수단이자 먹고살기 바빠 진보적 담론의 최신 흐름을 미처 따라잡지 못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수단이 되고 만다. --- p.195
좌파의 정체성 정치에는 한 가지 매력이 있다. 어렵게 저울질해야 할 이슈들을 다음과 같은 도덕적 명료함을 명분으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 --- p.198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의구심에는 정당한 핵심이 있다. 그 핵심의 뿌리는 정치체제의 관성에 대한 좌절이다. 내가 이 책에서 설명한 이론과 이념들은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성급함의 산물이기도 하다. … 다만 문제는 그런 접근방식이 새로운 좌절을 만들고 정치로부터 무시당했다고 느끼는 새로운 패배자를 탄생시킨다는 점이다. --- p.206~207
누구의 주장이 가장 강력한지 겨루고 다투고 타협하는 능력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그런데 정체성 정치는 자신의 견해를 절대화한다. 그런 식으로 진보적 관심사를 관료화하여 민주적 토론을 거치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정치발전이 아니라 사회분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