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혜숙 ruru100@yes24.com
인류의 탄생이래 끊임없이 제기되어온 화두 - "미란 무엇인가, 왜 미를 추구하는가"에 대한 오랜 논쟁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시간이나 문화적 공간에 따라 다르게 제시되고, 수많은 논쟁의 과정을 거치면서도 완전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미의 정체에 대한 논의는 따라서 다소 추상적이고, 허탈하게 끝날 수밖에 없다. 다만 우리가 미에 대해 가장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이란 미는 인간역사에서 지속적인 갈망의 존재였고, 끊임없이 추구되고 왔다는 명료한 사실, 결국 되돌아와 처음의 문제제기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미에 대한 논의를 포기할 수 없다. 결론이 나지 않는 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탐구하고, 논의하고자 하는 노력은 미에 대한 욕구만큼 강렬한 인간본성일지도 모른다.
『미-가장 예쁜 유전자만이 살아남는다』는 "미에 대한 욕구는 유전자에 숨겨져 있는 인류 생존의 본능과 관계가 있다"는 대전제를 깔고 인간의 생물학적 본능과 미의 관계를 역설하고 있다.
아무리 미가 시대적으로 다르게 규정되고 있고, 정치적·문화적 배경에 따라 결정되고 있다 해도 아름다운 것을 보고 즐기는 행위, 제어할 수 없는 미에 대한 근원적 욕구는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책에 따르면 생물학적 본성의 핵심은 종족 번성이고, 종족 번성의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성적 매력이다. 성적 매력의 핵심은 젊고 건강한 다산성이며 인류 진화과정에서 이러한 특성이 후손을 번성시켜 종을 보존하는데 유리한 것으로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에 현대인들도 젊고 건강하게 보이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또한 미란 후천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선천적인 본능임을 증명하기 위해 저자는 생후 3개월 된 아기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을 보여준다. 아기들에게 여러 가지 사진들을 보여주었을 때 아기들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매력적인 얼굴을 좀 더 오래 응시했다는 결과를 제시한다.
플라톤은 미를 빈틈없이 들어맞는 부분들에 대한 적절한 측정과 적절한 사이즈에 맞는 존재로 보았고, 르네상스 시대에는 아름다운 얼굴의 비율을 규정한 지침서가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엉덩이와 허리 사이즈의 비율, 팔다리의 길이 등 균형잡힌 몸을 추구하는 것 역시 인간의 근원적인 본능이며 또한 번식능력에 가장 적합한 형태라고 말한다.
저자는 그 동안 사회과학이 등한시해온 아름다움의 본성에 대해 비판하며 미는 '사소하고, 임의적인 문화적 인습'이 아니라 인간 경험의 보편적 부분임을 강하게 인식시키고 있다. 실제로 인지과학과 발달심리학적 관점을 발달시켜 미에 대한 민감성이 왜 인간 본성에 편재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며 미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습들을 현상적으로 잘 지적해 내고 있다. 타인의 눈에는 별로 드러나지 않는 결점을 가리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뼈를 깎고, 지방을 흡입하는 등 고통을 감수하며, 미국사회에서 교육이나 사회봉사에 쓰이는 돈보다 더 많은 돈이 미를 위해 쓰이고 있는 현상을 지적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미에 대한 탐색능력은 몇 초간의 짧은 순간에도 타인에 대한 미의 등급을 매길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하며, 아름다운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쉽게 타인의 도움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미에 대한 열망이 인간의 마음에 얼마나 크게 내재되어 있는가를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미가 인간의 근원적 본능임을 주장하는 저자의 의견에 동의하고, 미를 열망하는 사람들의 반응에 깊은 공감을 느끼면서도 미가 사회적?역사적 맥락에 의해 결정되고, 상업적 논리에 의해 조작된다는 사실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저자의 논의가 지닌 한계를 지적할 수밖에 없다.
미의 기준을 서구적 관점으로 전제하고 이야기를 하는 점이나 오늘날의 우상화된 미적 현상의 원인에 대해 깊숙이 파고들지 못한 채 현상의 표피에만 머무는 논의는 설득력을 갖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는 미의 진화론적 관점이 독특하게 전개되며, 또한 많은 부분에서 공감할 만한 현상을 정확히 지적해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이 책에 찬동할 수 없는 이유이다. 논의가 쉽고 경쾌하게 진행되더라도 관찰에 머문 채 핵심을 파고들지 못한다면 아름다움의 대가로 사회적 보상을 받는 사회의 원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자는 논리는 타당성을 잃을 수밖에 없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