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완은 절 뒤쪽으로 돌아갔다. 목탁소리가 서서히 멀어졌다. 뜰은 텅비어 있는 듯 보였다. 젊은 비구니가 막 고무신을 벗고 방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뒷모습으로 보이는 머리가 파르스레했다. 혜완은 자신도 모르게 그쪽으로 한 발자국을 옮겼다. 하지만 비구니는 돌아보지 않았고 조용히 방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혜완은 왠지 그 회색빛 옷자락을 붙들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닫힌 방문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하늘은 낮고 음울했고 멀리 산 아래로 또 이어져 있는 산들이 보였다. 누구라도 있어 주었으면 했다. 영선을 더 잘 기억할 수있는 사람이 누구라도 지금 자신의 곁에 있어 주었으면 했다. 다들 모른 척하고 돌아가 버린 지금 누구라도 좀 다가와서 손을 붙들어 주었으면 했던 것이다. 그때 그녀는 비구니가 들어간, 그 닫힌 방문 한쪽에 검은 글씨를 보았다. 나무판 위에 세로로 새겨진 글씨였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그제서야 눈물이 쏟아졌다.
--- p.289
--이말 참 좋지? 들어봐....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좋다고 혜완도 말했었다.
--넌 결국 여성해방의 깃발을 들고 오는 남자를 기다리는 센데렐라에 불과했던거야.
선우가 말했었다. 그랬다. 영선은 그 말의 뜻에 귀를 기울여야 했었다. 경혜처럼 행복하기를 포기하고, 혜완처럼 아이를 죽이기라도 해서 홀로 서야 했었다. 남들이 다 하는 남편 뒷바라지를 그냥 잘하려면 제 자신의 재능에 대한 욕심 같은 건 일지감치 버려야 했었다. 그래서 미꾸라지처럼 진창에서 몸부림치지 말아야 했다. 적어도 이 땅에서 살아가려면 그래야 하지 않았을까.
누군가와 더불어 행복해지고 싶었다면 그 눈군가가 다가오기 전에 스스로 행복해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재능에 대한 미련을 버릴수가 없었다면 그것을 버리지 말았어야 했다. 모욕을 감당할 수 없었다면 그녀 자신의 말대로 누구도 자신을 발닦개처럼 밟고 가도록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
--- p.294
아파서 혜완은 그를 떠밀어 버렸다. 하지만 남편의 힘은 밀어내는 그녀의 힘보다 훨씬 셌다. 그는 혜완의 머리채를 잡고 냉장고 앞으로 가서 거기에 그녀의 머리를 박았다. 냉장고 위의 말린 꽃을 넣어두곤 했던 꽃바구니 속에서 오색 빛깔 꽃들이 그녀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혜완이 흩어진 머리카락을 수습했을 때 남편은 말했다. -- 애를 죽이고서 그렇게 웃고 있는 너를 난 더이상 참을 수가 없어!
--- p.18
'니가 언젠가 말했지. 우리의 어머니들은 딸들에게는 어머니같은 사람은 되지 말아라 하고 가르치고, 아들에게는 어머니같은 여자를 얻어라 하고 가르쳤다고. 우리 세대는 그런 딸들과 그런 아들들이 만나 끝없이 갈등하는 세대라고. 그래 그 말은 공감해.....나 역시 남자야....이 말은 나 역시 이십년 동안 그리고 그 이후에도 사회에 뿌리 박힌 통념을 혼자서만 거부하지 못했던 한 인간이라는 뜻이야.....
그런 나는 어떤 때는 니가 좀더 고분고분하고 니가 조금만 더 멍청한 척해주고 니가 조금만 더 체념적이었으면 하고 바래...그것조차 부인하진 않겠어. 적어도 이십년 동안은 그렇게 하는 것이 여자의 본래 모습이라고 배워왔으니까...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야...너는 말했지.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잃어버린 시절에 대한 보상심리라고...한때 희망을 가졌던 세대라고 했던가? 그래 그것도 인정해. 하지만 그것도 다는 아니야...
이 세상에 전적으로 그것이 다인 그런 이유는 없어. 넌 여자들의 아픈 삶에 대해 나에게 누누이 역설했고 우리들의 몸에 밴 봉건성에 대해 성토했지만 넌 한가지는 간과했어. 그건 바로 그런 점이야. 그렇게 불완전한 여자와 남자가 만나서 애쓰지 않으면 문제는 남을 수밖에 없다는 거...넌 그걸 잊었었어...넌 남자가 홀연히 여성해방의 깃발을 들고서 나타나주기를 바랬던 거야...그게 너의 함정이었어...
그건 신데렐라의 왕자님이 유리구두대신 깃발을 들고 나타나는 것과 다르지 않아...그래서 내가 그 깃발을 쭈뼛거리며 들까 말까 망설였을 때 너는 그 깃발을 들고 망설이는 나의 손을 같이 잡아주는 대신 날 비난하기 시작했지.....너 역시 왕자님을 기다렸던거야...니가 경멸해 마지않던 그 신데렐라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거지.'
--- pp. 256-257
누군가와 더불어 행복해지고 싶었다면 그 누군가가 다가오기 전에 스스로 행복해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재능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가 없었다면 그것을 버리지 말았어야 했다. 모욕을 감당할 수 없었다면 그녀 자신의 말대로 누구도 자신을 발닦개처럼 밟고 가도록 만들지 말아야 했다.
--- p.2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