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고 싶은 거 생각났어.”
“……뭔데?”
해리는 태경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관심.”
“관심?”
생각지도 못한 태경의 말에 해리는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리고 말았다. 빙긋 웃으며 눈을 맞춰오는 태경의 시선을 피하지 못하고 한참 동안 태경을 바라보던 해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가 꺼낸 말을 가만히 곱씹었다.
“내가 당신에 대해 알고 있는 만큼 당신도 나에 대해서 많이 궁금해하고 알아보고, 생각해줘. 그게 내가 원하는 거야.”
“당신이 나에 대해 얼마만큼 알고 있는데?”
“생각보다 훨씬 많이. 아주 많이.”
낯선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미 오래전에 인연이 닿았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이번엔 마치 나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말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된 이야기인지, 어떻게 정리를 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본인보다도 내가 이해리에 대해 더 많은 걸 알고 있을걸.”
“그 말, 나한테 굉장히 관심이 많다는 말로 들려.”
“똑똑하네. 관심 많아. 아니, 이건 단순한 관심이 아니라…….”
해리는 숨도 쉬지 않고 그가 이을 말에 귀를 기울였다. 처음 그의 매장에 찾아갔던 후로 계속해서 생각했었다. 이 사람은 뭘 원하고 있을까. 그가 진짜로 원하는 건 무엇일까.
“사람들은 보통 이런 걸 사랑이라고 하지. 짝사랑.”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해리는 눈만 끔벅였다.
“농담하는 거 아니지?”
“진심을 그렇게 매도하면 가슴 아프지. 혼자서 애태운 시간이 얼만데. 그렇다고 사랑해달라고 보채거나 하진 않을 테니까 걱정 마. 그냥 이렇게 지내다가 조금 시간이 흐르면…… 날 사랑해주면 돼.”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이렇게 진지한 표정을 하고 이런 엄청난 말을 뱉어내니 더더욱 놀랍고 당황스러웠다.
“진심으로.”
그가 쐐기를 박았다. 이미 좋아하고 있었다는 말에 놀라고, 진심으로 사랑해달라는 말에 또 한 번 놀란 해리는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진심으로 사랑해달란 태경의 말에 해리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태경은 해리에게 더 묻지도, 재촉하지도 않았다. 그냥 그녀가 그래 줄 것이라고 믿어버린 모양이다.
도대체 그 마음이 언제부터 시작된 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건 10년 전 겨울. 영화 촬영을 이유로 서너 번 정도 봤을 뿐, 그 후론 그를 본 적도 지나가는 말로 소식을 들은 적도 없었다. 그때의 함태경은 잘생긴 걸로 이름이 자자한 인근의 고등학교 학생이었고 그 때문에 영화에 캐스팅을 했던 것뿐, 그가 어떤 사람인지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즈음엔 한 사람에게만 정신이 팔려 있어서 제 주변을 보지 못한 걸지도 모른다. 궁금한 게 너무 많았지만,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았지만 해리는 태경에게 묻지 않았다.
‘처음 만난 그날, 그의 기분이 지금 내 마음과 같았을까? 아니, 이미 좋아하고 있었다고 하니 내 제안이 반가웠을까? 대체 이 남자는 어느 별에서 뚝 하고 떨어졌을까. 왜 갑자기 나타나서 머릿속과 마음속을 헤집어놓는 걸까?’
“이러고 날 샐까?”
태경의 말에 번뜩 정신이 든 해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집 앞이었다.
“벌써 다 왔네.”
“벌써하고도 십오 분 전에 왔어.”
세상에. 차가 멈춘 줄도 모르고 십오 분 동안 멍하니 앉아서 내리지도 않았다니.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봤을 함태경도 좀 이상한 것 같고.
해리는 안전벨트를 풀고 차 문을 열려 했다. 하지만 잠금장치가 잠긴 차 문은 열리지 않았고, 태경에게 문을 열어달라는 눈짓을 했다.
“차비는 없어?”
“자기가 데려다 준다고 박박 우겨놓고 무슨 차비를 달래?”
해리의 타박에 태경은 피식 웃더니 팔짱을 끼고 시트 깊숙이 상체를 묻었다.
“빨리 열어줘.”
“저기 좀 봐.”
태경은 해리의 말엔 관심도 없다는 듯 대꾸도 하지 않고, 새까만 하늘을 향해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반짝이는 별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서울 하늘에서도 저런 예쁜 별자리를 볼 수 있다니, 괜스레 반가웠다.
“별 볼 줄 알아?”
“모르지.”
“뭐야. 난 또 아는 줄 알았더니.”
하마터면 별들의 이야기를 아는 낭만적인 남자인 줄 착각할 뻔했다. 실망한 표정으로 태경을 바라보던 해리는 운전석 문 쪽으로 상체를 숙여 잠금장치를 찾아내 해제시켰다.
“갈게.”
“잠깐만.”
막 문을 열려는데, 그가 또다시 잡아 세웠다. 해리는 문고리를 손에 쥔 채 어정쩡하게 태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제 다 온 거 맞지?”
“그게 무슨…….”
“쉬운 길을 못 찾아서 조금 돌아오긴 했는데…… 그래도 제대로 도착한 거 맞지?”
늘 장난기가 가득하던 그의 두 눈이 아스라해졌다. 그를 만나고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눈빛이,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조급한 음성이 해리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이 남자, 정말 날 좋아했던 건가?’
“제대로 왔으니까, 이렇게 다시 시작된 거겠지?”
이런 시작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저 적당한 사람과 만나 시간이 흘러 자연스레 정이 들고, 운이 좋아 사랑까지 하게 된다면 더없이 기쁠 거라고, 그래서 처음부터 사랑받고 사랑한다는 건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한 남자가 오래전부터 그녀를 좋아했다고 말을 했고, 그런 그와 3주 후엔 부부가 된다. 스치듯 닿았던 아주 짧았던 인연이 전부인 남자가 언제부터, 무엇 때문에 좋아해줬는지 그 이유까진 아직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누군가 날 좋아해주고 있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사랑받는 건 내 몫이 아닌 줄만 알았다. 하나를 받고 열을 주어도 늘 안타까워하던 바보 같은 사랑의 끝은, 늘 상처받고 힘겨워하는 것만이 내 것인 줄만 알았는데…….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