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곧장 계단을 뛰어내려간다. 내가 현관에 이르기도 전에 총성이 들린다. 나는 거리로 뛰쳐나간다. 엄마가 땅바닥에 모로 누운 채 널브러져 있다. 남자는 엄마를 내려다보고 서서 엄마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있다. 그는 여전히 그림자에 얼굴을 숨긴 채 고개를 들고 길에 나온 나를 본다. 나는 바로 집 앞에 서서 옴짝달싹 못 하고 있다. 그는 침착하게 나를 주시한다. 마치 지금 이 상황이 지극히 일상적이라는 듯이, 누가 듣든 보든 아무 상관없다는 듯이. ---p.56
집은 예전 같아 보이지만, 실은 송두리째 달라졌다. 내 인생도 발칵 뒤엎어졌다. 어디서부터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누구를 믿어야 할지, 믿을 사람이 있기는 한 건지 머릿속이 깜깜하다. ---p.81
나는 돌아보지 않고 계속해서 걷는다. 다른 남자들은 사라졌고 거리는 텅 비어 있다. 나는 달리면서 운다. 아까는 너무 무서워서 울음을 터뜨릴 수도 없었다. 언제부터 눈물이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나는 지금 울면서 공원을 지나고 주택 단지를 가로지른다. 온통 엄마 얼굴이 떠올라 머릿속이 터져 버릴 것 같다. 아빠 얼굴도.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p.150
아빠는 벌컥 화를 내며 주먹을 꽉 움켜쥐더니, 곧 힘겹게 화를 누르고 다시 차를 몰기 시작한다. 나는 나 자신을 저주한다. 아빠가 처음으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려는데 내가 너무 심하게 몰아붙였다. 이제 아빠는 입을 다물고 있다. 아마 다시는 대화하려고 들지 않을 것이다. ---p.163
나는 중얼거리며 주위를 둘러본다. 덜컹거리며 지나가는 자동차며 택시며 버스, 그리고 움직이는 차 안의 얼굴들을 바라본다. 갈 길을 재촉하는 인생들, 내가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사람들. 그들은 나에게 신경 쓰지 않고, 그들이 그래야 할 이유 따위는 없다. 아무도 나 같은 건 거들떠보지 않고, 그건 인도를 걷는 행인들도 마찬가지다. 이 순간 나에게는 사연이라든가, 그들을 멈춰 세울 만한 뭔가가 없다. 총에 맞은 엄마도 술주정뱅이 아빠도 없다. ---p.202
곧 경찰은 사라진다. 침묵이 거대한 추처럼 우리를 내리누른다. 말할 기분인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다. 텅 빈 병실에 우리 셋만 남겨지자 침묵은 더욱 무겁게 느껴진다. 엄마는 여전히 내 손을 잡고 내 쪽으로 몸을 숙이고 있지만 역시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이다. 아빠는 다시 의자에 물러나 앉았고 여전히 내 눈을 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