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밥상머리에서 일어나는 문제와 갈등이 음식 때문에 나타나는 일은 거의 없다. 오히려 그런 일들은 식구들 각자의 기분과 가정의 분위기를 나타내는 지표인 것이다. 갈등이 나타날 때마다 그걸 억누르기만 한다면, 우리는 집안 분위기 전체를 바라보는 안목을 더욱 잃게 된다.
○ 즐거운 식사시간은 맛있는 음식, 세심함, 책임, 친밀함, 미적 취향, 감각적 경험, 예측 불가능한 인간적인 느낌과 분위기가 균형 있게 조화를 이룬 것이다.
○ 그러므로 식사시간은 아이들이나 다른 식구를 교육하기에 적당한 타이밍은 아니다. 오히려 식사시간은 우리가 가족을 바로 지금 -그리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느낄 수 있는 장이다.
○ 훈육의 경우에는 어른은 다 알고 아이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훈육은 권력투쟁을 가져온다. 무능하다고 여겨진다든지 하향식 통제를 받기 좋아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 이에 비해 동참은 자존감, 자신감, 책임감, 소통능력을 필요로 하고, 누구나 동등하다는 데 기초를 둔다.
○ 우리 가족의 밥상에 놓인 음식은 맛과 영양이라는 측면에서의 가치 외에도 또 다른 의미가 있다. 그것은 부모의 정성과 사랑과 보살핌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 인생의 어떤 상황이 그 자체로 문제가 되는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그런 상황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따라서, 우리는 그런 상황을 긍정적인 것,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 실망스러운 것, 불필요한 것, 지루한 것 등으로 경험하게 된다.
○ 한 집안의 부엌은 그 집의 “심장”이다. 그곳은 음식을 준비하고 요리하는 공간이며,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머물기 좋아하고 들락거리는 가정의 핵심 공간 가운데 하나이다. 부모 중 한 쪽이나 양쪽 모두 요리를 즐긴다면, 부엌은 가정의 다른 공간들을 향해 긍정적 에너지를 발산하는 공간이 된다.
○ 유치원 같은 시설에서 아이들은 아이이기를 배운다. 오로지 집에서만 어른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배울 수 있다. 건전한 유년기를 위해서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은 모두 중요하다. (아버지가 집에 페인트칠을 하거나 세차를 하거나 정원을 가꿀 때 옆에 함께 있는 것보다, 네 살 먹은 개구쟁이한테 더 신나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 어른과 아이가 함께 있고 함께 일하는 것 자체가 궁극적 교육이다!
○ 아이가 음식에 대해 세련되고 합리적인 태도를 가지기를 원한다면, 음식으로 위협하거나 처벌하거나 유혹하는 것은 나쁜 방법이다.
○ 식사가 아닌 다른 일들에서 부모가 보여주는 비합리적 태도들은, 함께 밥을 먹을 때 부메랑처럼 부모 자신에게 돌아온다.
○ 부모 자신이 올바르게 행동한다면, 아이에게서 원하는 것의 절반은 이미 이루게 될 것이다!
○ 부모가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혹은 아이가 너무 예뻐서- 줏대 없이 오락가락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규범과 가치를 고수하는 편이 가족 모두에게 낫다.
○ 갈등은 가족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성숙하고 편안한 가족은 갈등을 덮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갈등에 정면으로 맞서면서 그런 갈등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찾아낸다.
○ 식사 분위기에 대해 능동적으로 책임을 지는 것과 그저 “집안의 평화를 위하여” 입을 다무는 것은 사뭇 다르다는 사실이다. 첫 번째 경우에는 보람된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그러나 두 번째 경우에는 나쁜 분위기가 수면 아래로 숨어버릴 뿐, 다른 형태의 싸움이 계속되는 것이다.
○ 무엇보다도 집안에서 아이들이 배우는 중요한 특성은 너그러움과 관용이다. 옳고 그름만을 찾는 것은 헛된 짓이고 자기만 옳다는 생각은 분위기만 망친다.
○ 아이를 가르치는 데는 교훈적인 설교보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솔직한 말이 더 효과적이다. 더구나 이런 가르침에 위협이 들어있으면 안 된다. 그러나 한번쯤 화를 내는 것은 필요하기도 한데, 요즘 부모들은 그런 일을 지나치게 두려워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 이제 아이들에게 가정이란, 한 번쯤은 자제력을 내던지고 감히 가면을 벗어버리는 어른들을 만날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 아이의 견해에 기꺼이 귀를 기울여주라. 아이를 이야기에 끼워주면 어른들의 토론은 좀 더 현명해지곤 한다.
○ 함께 앉아 즐기는 가족식사의 제일 좋은 점은, 우리가 자기 자신과 다른 식구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그리고 바로 그날의 모습 그대로, 바라보고 느낄 수 있다는 데 있다. 이때 식구는 ‘혼자 독립된 주체이면서 동시에 함께’ 공동체를 이룬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