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최정례의 시는 어디에 있는가. 그의 이번 시집은 새로워진다는 것의 의미를 새삼 돌아보게 만든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유로움이다. 최정례에게 새로워진다는 것은 자유로워진다는 것이요, 또한 자유로워진 만큼 시는 새로워진다는 것이다. 양자는 서로를 동시에 견인해 내는 것이기에 특별한 넓이를 지닌다. 이번 시집에서는 산문시를 향한 탐험으로 인해 이 넓이가 더 광대하고 예측 불허가 되었다. 산문시란 무엇보다 시적 호흡을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시의 호흡이 보증해주는 회복력, 탄성, 구심력 같은 것들을 넘어서려는 것이며, 대신 진정한 자유, 무장해제된 모험과 위태로움의 길을 가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돌아오는 길을 알지 못하며 반복과 마주침의 구원을 붙잡지 않는다. 오직 일상과 현상의 덤불 속으로 망설임 없이 엎질러질 뿐이다. 최정례의 산문시는 그 덤불 속에 있다. 그리고 시의 위의(威儀) 속으로 포섭되기 위해 덤불 위로 몸을 일으키지 않는다. 시 너머의 시, 덤불의 시, 그의 시는 이렇게 시가 아닐 때까지 그리하여 아마도 산문시도 산문시가 아닐 때까지 가려는 것이겠지. 직선이 직선이 아닐 때까지, 곡선이 곡선이 아니고, 사유가 사유가 아닐 때까지, 아이가 아이가 아니고, 어른이 어른이 아니고, 현재는 현재가 아니고, 나는 내가 아닐 때까지 나아가려는 것이겠지. 최정례의 시는 어디까지 갈 것인가. 이번 시집으로 인해 더욱 예단할 수 없게 되었다. 다만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는 더 멀리 나아갈 것이라는 점이다. 이수명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