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때로는 구약성경의 하나님은 보복과 처벌의 하나님이었던 반면에, 신약성경의 하나님은 용서와 자비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이런 식의 주장이 성경의 하나님의 성격에 관한 양면성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내가 배운 방식이었다... 구약성경의 하나님은 “나쁜 경찰”이며 신약성경의 하나님은 “착한 경찰”이라는 주장은 그리스도교 성경 전체를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만 설득력을 갖고 있었다.--- p.27~28
이제 나는 길가메쉬와 엔키두 이야기로부터, 창세기 2-3장의 아담과 하와의 서사시로 넘어가겠다. 나의 질문을 다시 묻겠다. 우리가 길가메쉬와 엔키두 이야기를 모체로 삼을 때, 우리는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다르게, 즉 올바르게 보게 되는가? 아담과 하와 이야기의 모체에 대한 단서로서, 이 두 이야기가 다음과 같은 점에서 근본적으로 평행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p.75~76
영생이라는 질문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혹하며 정직한 사실주의를 가르쳤다. 이스라엘은 지리상으로 이집트 영토와 가까웠지만, 지적으로는 메소포타미아 신학과 훨씬 가까웠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그 역사의 대부분 기간 동안(기원전 마지막 2세기까지) 영생에 대해 전혀 인정하지 않은 채, 토라의 권위, 예언의 영광, 시편의 아름다움, 지혜의 도전을 창조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났을 수는 있지만, 결코 메소포타미아를 떠나지는 못했다.--- p.80
에덴동산의 영생의 나무 이야기나 길가메쉬의 불로초(영원한 젊음의 식물) 이야기는 낙원(paradise)을 상실한 비극들이 아니었다. 그 이야기들은 단순히 불가능성에 대한 비유들이었다. 인간의 운명은 영원한 젊음을 주거나 행복한 내세를 주는 것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메소포타미아는 이집트가 아니었다. 그런데 죽음 이후의 내세에 대한 믿음과 관련해서, 도대체 왜 메소포타미아는 이집트와 그처럼 달랐는가?--- p.82
이스라엘이 스스로 홍수 이야기를 창조했다기보다 메소포타미아의 홍수 전승으로부터 그 이야기를 받아들였다는 점을 인정하고, 또한 하나님이 “다시는” 그런 신적인 테러리즘을 수행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는 점을 받아들인다 해도, 우리가 성경의 처음 열 장을 다 읽기도 전에,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정의를 회복하는 차원보다는 훨씬 더 일반적인 보복의 차원에서 보복적 정의를 행사하는 분으로 나타나셨다.(도대체 동물들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홍수로 쓸어버리셨는가?) 내가 이 책에서 더욱 강하게 도전하는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들로서 도대체 어떻게 우리의 성경을 읽어야 마땅한가? 성경의 처음 몇 장이 거의 즉각적으로 제시하는 하나님은 우리의 최선보다 훨씬 더 훌륭하신 하나님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최악보다 훨씬 더 잔악한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으니 말이다.--- p.104~105
나는 아시리아 방식의 종주-봉신 조약들 가운데 하나의 전형적 사례를 제시하면서, 특히 그 스타일과 형식에 주목할 것인데, 이것은 봉신들이 장차 충성하지 않을 경우 스스로 저주 받을 것을 서약하는 상벌규정의 폭력과 테러리즘에 주목하겠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런 것들이 앞의 5장에서 살펴본 히타이트 방식의 조약에 나오는 전문, 역사, 법, 증인, 상벌규정과 얼마나 다른가를 알게 된다.--- p.132
신명기 계약의 상벌규정에 대한 관점은 두 방향으로 나타났다. 하나는 현재로부터 미래로 향한다. 즉 만일 당신이 순종하면 복을 받을 것이며,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 둘째는 현재로부터 과거로 향한다. 즉 당신이 복을 받았다면 당신은 순종했기 때문이며, 당신이 저주를 받았다면 당신이 불순종했기 때문이다.--- p.136
신명기 신학은 신명기 전승 자체 안에서조차 작동하지 않았다. 므나쎄 왕과 요시아 왕의 경우처럼, 고전적인 불일치 때문에 역대기 저자는 역사를 신학에 맞도록 역사적 “수정”을 할 필요가 있었다. 더 나아가, 이와 똑같은 일이 신명기 전승 바깥에서는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p.140
네로 황제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주적인 로마제국을 파멸시킬 것이며, 그 신격화된 로마 황제와 로마의 모든 제국을 파괴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이 일을 위해서 사용할 폭력은 로마제국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어떤 폭력보다도 훨씬 더 능가하는 폭력이다. 매우 끔찍하고, 또 끔찍하며, 또 끔찍한 역설적 방식으로, 요한계시록은 돌아오는 네로 황제와 그의 파르티아 군사력을, 돌아오는 그리스도와 그의 천군천사로 대체시켰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요한계시록의 최악의 명예훼손이며, 예수에 대한 최악의 중상모략이다. 이것은 또 성령에 대한 최악의 죄이기도 하다.--- p.254
신약성경이 그토록 재빠르게 로마의 문화 속에 적응하고 변용되어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준비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슬픈 일이다. 우리는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가?”를 결코 배우지 못한 모든 사람들이 겪게 된 수난, 특히 그리스도를 가짜 그리스도(pseudo-Christ)에 반대되게 읽어야 하고, 바울을 가짜 바울(pseudo-Paul)에 반대되게 읽어야 하는 문제가 관련될 때, 이런 분별력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겪게 된 수난에 대해 적어도 탄식할 수는 있다.
--- p.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