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십대의 벗들은 아름다웠다. 그리고 나는 조금 쓸쓸했다. ‘저도 시인처럼 해저물녘 시간을 너무 좋아해요. 그런데 그 시간에 저녁 도시락 먹고 부랴부랴 야자 준비하다 보면 날은 벌써 캄캄해져 있어요…’ 내 산문집의 한 대목을 읽고 난 소녀의 목소리가 많이 젖어 있었고, 절개지를 지나는 바람처럼 내 마음도 울컥거렸다. 그날, 그처럼 일렁인 순간이 여러 번 있었다. 어떤 벗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어떤 벗은 노래를, 시를, 열렬한 꿈의 모색을 얘기하면 자연스레 현실의 답답함까지 토로하게 되었다. - ‘그러니 애들아’ --- p.15
나는 소년에게 꽃을 샀다. 원 달러에 한 송이. 그랬더니 소년이 바구니를 뒤적여 상하지 않은 예쁜 꽃 하나를 덤으로 내게 내밀며 살짝 미소 지었다. 엉겁결에 ‘쌩큐’라고 말했다가 얼른 고쳐 말했다. “오쿤!” 여행 책자를 뒤적여 미리 배워놓은 고맙다는 뜻의 캄보디아 말이었다. “오쿤 찌란!” 소년이 조용히 응답하며 아주 환하게 웃었다. - ‘수련을 꿈꾸다’ ---p.85
단풍의 예감으로 두근거리는 산빛입니다. 벗! 단풍을 놀 때가 왔나봐요. 어서 나가 보세요. 절정이라는 때에 몰려가지 말고요. 저 초록 속에서 단풍은 벌써 시작입니다. 멀리 가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아파트 공원 앞에 그대가 마음 준 나무 한 그루가 어떻게 단풍의 기미를 보이고 절정을 맞으며 기꺼이 자신을 낮은 곳의 대지로 데리고 가는지, 가장 간소해진 몸으로 어떻게 겨울로 가는지 지켜봐 주세요. 어떻게 봄을 맞는지를. - ‘단풍에게 진보를 묻다’ ---p.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