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문리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사학과를 거쳐 국사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민대학교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 대학원 교수로 있으면서 미국 하버드 옌칭 연구소 연구교수와 독일 튀빙겐 대학 객원교수를 역임했다. 정신문화연구원 부원장, 연세대학교 용재석좌교수를 지냈고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현재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남명학연구원장,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한국의 과거제도』, 『조선 초기 양반연구』, 『조선의 사회와 사상』, 『조선양반사회연구』, 『한국역사의 이해』1~7, 『조선왕조사』, 『조선시대 당쟁사』, 『조선을 만든 사람들』『명장열전』등 다수가 있다.
공서와 청서의 첨예한 대립은 인사 문제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인사는 정치적 기반의 확보와 직결되는 문제였다. 인조는 서인, 특히 공서의 독주를 견제할 목적으로 남인과 북인을 널리 기용했다. 폐모론에 가담했던 인물까지도 포함된 파격적인 인사였다. 그런데 이러한 인조의 인사 기용에 당시 이조판서로서 독점적인 인사권을 행사하던 김류가 적극 동조하고 나섰다. 공서인 그가 남인과 북인의 기용에 찬성한 이유는 청서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_112쪽
예송 논쟁은 중앙 정계에 그치지 않고 성균관과 지방 유생들에게도 확산되었다. 특히 1666년(현종 7) 2월에 영남 유생 유세철(柳世哲) 등 1천여 명은 송시열의 기년설(朞年說)을 비판하고 허목의 3년설을 지지하는 상소를 올려 정국을 또 한 번 긴장시켰다. 유세철 등은 물론 처벌되었다. 반대로 홍득우(洪得雨) 등 성균관 유생들과 기호 유생들은 송시열을 옹호하고 유세철을 공격했다. 전국이 당쟁의 소용돌이에 말려들고 있었다. _156쪽
기사환국과 갑술환국은 서남 간 정권 교체를 가져온 대표적인 정변이었다. 그런데 이 두 사건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왕비의 교체였다. 또한 이들 사건에는 숙종의 차기 승계자인 경종의 운명도 늘 함께했다. 갑술환국으로 세자의 절대적 후원 세력이던 남인과 희빈 장씨가 몰락했다. 이들의 몰락으로 세자의 지위마저 불안해졌다. 이때 남구만을 비롯한 일군의 소론 세력은 장씨 남매와 세자의 보호를 자임하고 나섰다. 이제 정국은 장씨 남매의 처벌과 세자 보호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이 정면 대결하는 구도로 바뀌었다._206쪽
탕평이란, 군왕은 탕탕평평한 마음으로, 그리고 신하들은 무편무당한 자세로 정치에 임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탕평을 외쳤던 영조 대에서도 정파는 존재했다. 영조 역시 현실적으로 이들 정파를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는 무편무당의 경지 대신 현실로 존재하는 이들 정파의 이해관계를 쌍거호대, 양치양해라는 조제보합책으로 조절해 나가고자 했다. 근본적으로 영조는 노론의 기반에서 성장했다. 그 때문에 즉위 후 한결같이 탕평을 외쳤지만, 결국은 노론에 비중을 더 둘 수밖에 없었다. 영조는 노론을 중심으로 정치적 안정을 기한 다음 그 바탕에서 노론과 소론의 탕평을 꾀했다. _23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