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원조형예술대 애니메이션과를 졸업하고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2009년 EBS 주최 ‘세계 일러스트 거장전’의 일러스트레이션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았고, 2010년 ‘상상마당 볼로냐 워크숍’을 통해 진행된 작품 『그리미의 하얀 캔버스』로 2012년 볼로냐 라가치상 오페라프리마상을 받았습니다. 그림책인 『그리미의 하얀 캔버스』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으며, 동화 『내 머리에 햇살 냄새』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나는 밥을 많이 먹어서인지 얼굴이 크다. 미지와 나란히 서면 내 얼굴이 미지 얼굴의 두 배다. 엄마는 밥 먹는 것하고 얼굴 크기하고는 상관없다고 했다. 나도 처음에는 그 말을 믿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상관이 있는 것 같다. 얼굴 크기뿐이면 말도 안한다. 나는 날씬하지 않다. 그냥 날씬하지 않은 걸로만 알았었는데 뚱뚱한 거였다. 엄마는 나를 보고 딱 보기 좋다고 했다. 그 말도 믿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동안 엄마한테 속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제 민호가 내 배를 보고 피식 웃었다. 하필이면 달라붙는 셔츠를 입고 있어서, 두 겹으로 겹친 배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나는 그때 민호의 표정을 보고 하늘이 내 머리 위로 쿵 하고 내려앉는 줄 알았다.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곧 별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민호는 내 첫사랑이다. 유치원 때 민호를 처음 본 순간부터 좋아했고 지금도 그렇다. 그런데……. 슬펐다. 그래서 나는 다이어트를 하기로 결심했다. 결국 식탁에는 할아버지와 엄마만 마주 보고 앉았다. “미담이도 어서 앉아라.” 할아버지는 친절하게 숟가락을 집어 주며 말했다. “저도 밥 안 먹어요. 아니, 못 먹어요.” 나는 고개를 숙이고 힘주어 말했다. “왜, 어디 아파?” 엄마가 놀란 얼굴로 내 이마를 짚었다. “열은 없는데?” 엄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담이 얼굴 표정이 영 안 좋다.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냐?” 할아버지가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걱정은 무슨 걱정이 있겠어요. 코딱지만한 게.” --- p.17-18
무슨 대단한 비밀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살그머니 벽에 붙어서 엄마가 하는 말을 엿들었다. “아, 글쎄 일찍 들어오라니까. 그렇게 꼬치꼬치 묻지 말고……. 아휴, 일이 생겼으니까 일찍 들어오라는 거 아니야. 아버님이 유언장을 미리 써 놓으시겠대. 시골에 있는 땅하고 집, 제과점 건물, 그리고 아버님이 갖고 계신 돈 이런 거 모두 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어디에 어떻게 쓰라고 미리 써 놓으시겠다는 거야. 말씀하시는 걸로 봐서는 벌써 써 놓으신 것 같기도 하고 곧 쓰시겠다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중요한 건 절대 당신한테 유산을 물려주실 것 같지 않아. 뭐? 미담이하고 미지한테 물려줄 것 같냐고? 미담이, 미지는 아직 어린데 그게 말이 돼? 아무튼 일찍 들어와. 일찍 들어와서 얘기하자고.” 엄마는 제발 일찍 좀 들어오라고 아빠에게 통사정했다. 할아버지는 알부자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할아버지 친구들도 그렇게 말하고 친척들도 모이면 똑같이 말한다. 할아버지는 몇 십 년 동안 설렁탕집을 했는데 원조 맛집으로 전국 방방곡곡에 소문이 났다. 설렁탕을 먹으러 오면 번호표를 뽑고 기다려야 할 정도로 손님이 많았고 맛있는 음식을 소개하는 방송 프로그램에서 할아버지를 인터뷰하기도 했다. 할머니 말을 빌리자면 그때는 낮에 설렁탕 판돈을 저녁에 깔고 자고 베고 잤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설렁탕을 팔아 땅도 사고 건물도 샀다. 통장에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이 예금되어 있다고 하는데 나는 안 봐서 확실한 것은 모른다. --- p.54-55
“전화로 한 말이 사실이냐?” 할머니가 물었다. 엄마는 할머니 손을 꼭 잡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 영감이 제정신이 아닌가 보다. 돈을 혼자 벌었다니? 삼십오 년 동안 설렁탕 장사하면서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밤새 장작불에 국물 맛나게 우려낸 사람도 나고 새벽부터 싱싱한 채소를 사와 천하제일의 깍두기를 담근 사람도 나다. 그런데 그 돈을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고? 가족들에게는 절대로 나눠 주지 않겠다고?” 할머니 목소리가 온 집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어머니, 진정하시고요. 아무튼 아버님께서 그렇게 하신다고 하니까 문제지요. 일단 아버님과 대화가 필요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분위기도 부드럽게 만들어야 하고요. 그래서 미담이 아빠와 상의했는데, 아침밥을 함께 먹는 방법이 제일 좋을 것 같아요. 아버님께 화목한 가족의 모습을 보여드리면 아버님 마음도 풀리실 테니까요. 그때 대화하면서 아버님 마음을 바꿔야지요. 그러니까 어머님도 협조하셔야 해요. 아버님께 화내시면 절대 안 되고요. 침착, 또 침착하셔야 해요.” --- p.78-79
“이렇게 아침밥상 앞에 온 가족이 모여 앉으니 얼마나 좋으냐. 서로 얼굴도 보고 대화도 하고 말이다. 지난번에 텔레비전에 어떤 유명한 박사님이 나오셨었다. 우리나라 사람인데 미국에서도 유명한 대학의 교수님으로 일하셨던 분이지. 그런데 그분은 가족들과 꼭 아침밥을 같이 먹었다고 하더라. 아침밥 먹는 시간이 아니면 가족끼리 대화를 나눌 수가 없어서 말이다. 저녁에는 각자의 스케줄이 다르니 모이기 어렵거든. 우리 가족도 그렇지.” 할아버지는 미지 숟가락에 콩자반을 올려 주며 말했다. 반들반들 윤기가 흐르는 까만 콩자반을 본 미지는 금세 울상이 되었다. “훌륭하신 교수님이시군요. 그런데 그 교수님은 늦게 출근하셔도 되었나 보군요.” 아빠가 말했다. “아니다. 몇 년 동안은 아주 먼 곳으로 출퇴근을 하게 되었는데 집에서 새벽 3시에 나가야 했다더라. 그래서 새벽 2시 30분에 아이들을 깨워 함께 아침밥을 먹었다는구나.” 새벽 2시 30분에 먹으면 야식이지 무슨 아침밥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