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미란에게 가려고 했었다. 언니는 수화기 저편에서 미란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를 했다. 수화기를 타고 들려오는 언니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미란이 이상하다고 했다. 미란의 남자 친구라고 하는 이가 병원으로 찾아왔는데 미란이가 그 남자 친구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지환이냐고 물었다. 지환이가 누군데? 언니가 되물었다. 미란이가 지환에 대해서는 언니한테 말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하긴 나도 지환을 안다고 할 수 없지. 가평의 우리들의 옛집이 허물어지던 날 미란이와 함께 가평 집에 오토바이를 타고 왔던 청년이라는 것밖에는.
--- p.30
좀 먹먹하다. 곧 봄이 온다는 것도, 올해가 20세기의 마지막 해라는 것도, 반지를 잃어버린 것도, 이 소설을 붙잡고 시름에 겨워했던 시간들도...... 아닌가? 그저 지난 밤, 잠이 모자란 탓인가? 서른이 되면서 너무 허전해서 내 손가락에 내가 끼어주었던 18케이 반지를 잃어버렸다. 그 동안 자존심이 상할 때나 마음이 불안할 때면 만지작거리던 것이었는데...... 자국만 남아 있는 손가락이 너무 허전하다.
예전의 나는 소설이 뭘 움직일 수 있겠느냐 생각했다. 뭘 변화시킬 수 있겠느냐고. 그렇게 여기고 있을 때는 오히려 소설의 힘이 셌던 때였던 것 같다. 나 자신이 소설을 통해서 사람이 되는 과정을 걸어왔으니. 소설의 힘이 전혀 업어 보이는 요즘 나는 좀 변한 것 같다. 지금에야 나는 소설의 효용가치를 믿고 싶어진다.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싶고,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을 것 같은 우리들 생의 모랄에 끼여들어 새 인사를 하고 싶고, 인간이 지닌 친밀성에 대해서 냉소적인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만 변화시켜놓고 싶다.
--- p.3
이따금 나는 내 삶이 필름이 들어있지 않는 카메라를 누르고 있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이 결락감이 무엇인지를 당신께 설명할수 있엇으면 좋겠어요. 뭐라고 말해야 하나요..... 살다보면 인생의 재구성이 필요한 시기가 있는 법이지
--- p.70
얼마나 달렸을까. 그들이 있는 마을과 바다가 멀어진 뒤 나는 해안도로 한편에 차를 세웠다. 눈물이 쏟아져서 더는 운전을 할 수가 없었다. 핸들에 얼굴을 묻었다. 참으려고 하지도 않고 나는 오랫동안 소리내어 울었다. 도로 저편이 바다인가. 파도소리가 귓전에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미란이 갓 태어난 송아지처럼 내 무릎에 자꾸 제 얼굴을 비벼대었다. 그래도.... 고맙다. 살아 있어주어서..
--- p.243
'어떤 발을 주로 쓰지?' 미란은 자신이 어떤 발을 주로 쓰는지를 모르겠는 모양인지 대답을 못하고 가만 서 있다. 갑자기 아래층 여자가 미란의 등뒤에 서더니 미란의 등을 살짝 밀었다. 그러자 미란의 왼발이 앞으로 나간다. '왼발잡이군' 나는 피식, 웃었다. 왼손잡이란 말은 들어봤지만 왼발잡이란 말은 처음이다.
'멀리뛰기 높이뛰기를 할 때는 주로 쓰는 발을 쓰고 축이 되는 발로는 땅을 차는 거야.' 아래층 여자는 마치 미란의 스케이트 보드 개인 강사 같다. 푸른색 핫팬츠 밑에 미란은 내 부츠를 신고 있다. 내 사이즈가 미란에게 맞았을까? '밀어내기에 너무 집중하지 마. 그러면 앞쪽 다리의 중심이 뒤로 가버려서 속도가 나질 않아. 밸런스가 깨어지면 넘어지게 되어 있어. 처음에는 속도보다 밸런스가 중요해. 앞다리에만 중심을 두고 이동한다는 느낌으로.'
--- p.178-179
선생님... 제가 주제넘은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믿어요. 더디게지만 천천히지만 좋은 쪽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중략 - 다시 만나지 못하더라도 이따금 생각해주세요. 바다 건너 여기에 선생님이 사랑했던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그리 나쁘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
--- 본문 중에서
달콤한 잠에 빠졌다가도 빗소리나 고독한 건물의 검은 그림자 같은 것에 잠이 깨면 어김없이 중얼거리곤 했지. 한발짝만 더 나아가면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어. 잃어버린 기억으로부터.... 청춘시절로부터.
--- p.212
누구일까. 내 의식의 저편에서 꾸물꾸물거리는 이 사람은? 몇 토막의 목소리로만 남아 있는 이 사람들은? 내가 아는 사람들인 것도 같고 모르는 사람들인 것도 같은 그들. 나는 그들과 무슨 관계이길래 이렇게 그립기까지 할까.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여학생이 공중전화 턱을 발로 턱턱 찼다. 발소리를 듣고서야 이 공중전화박스 안에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길이나 잡고 걸었다. 내 안에서 아무 연관성도 없이 불쑥불쑥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얼굴을 잃고 헤매이는 이 목소리들. 미란으로 인해 내 무의식의 어딘가가 일깨워지려 하는 참인 것 같았다.
--- p.45
그래,당신.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커다란 배낭을 짊어지고서 길거리에 서 있는 당신을 보면 나느 이상스레 안심이 되었다. 아무리 복잡한 일도 당신과 함께 있으면 어떻게 해결될 것 같았지. 그랬는데 어떻게 된 거야? 기억 속으로 엄청나게 쏟아지던 졸음. 내팔에 대한 너의 말. 당신은 내 팔을 보고 그랬지. 대강대강 그러나 단단하게 붙어 있는 것이 마음에 든다고. 대강대강 그러나 단단하게, 라는 표현을 쓸 수 있는 사람은 흔하지 않아. 한 시절, 쏟아지는 졸음과 사투를 벌였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싶었지만 자꾸만 졸음이 쏟아졌어. 벽을 향해 돌아앉으며 미란이처럼 주먹을 꾹, 쥐었지. 우리는 왜 이렇게 멀어졌을까. 작별 인사는 누가 먼저 했을가? 누가 먼저 했길래 이렇게 괴로운 말이 내게 남아 있을까.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리. 내 생애, 다시 너를 생각하는 일은 없으리, 라느.
--- 본문 중에서
그래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청춘의 한때를 기억하지 못한 채 서른다섯이 되는 동안 여기저기 마음이 상하고 지치기도 했지. 기억을 저버린 채 세상은 변하지 않고 돌아간다. 달콤한 잠에 빠졌다가도 빗소리나 고독한 건물의 검은 그림자 같은 것에 잠이 깨면 어김없이 중얼거리곤 했지. 한발짝만 더 나아가면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어. 잃어버린 기억으로 부터... 청춘 시절로부터.
--- p.212
'그가 아닌 다른 사람과 다시 시작하려고 그와 헤어진 건 아니었어. 나는 끝내고 싶었어. 여기에도 저기에도 속할 수 없는 내 새을 그냥 내가 버리고 싶었어. 내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 세 사람은 다 망가지게 되어 있었지. 나는 알고 있었어. 내가 그 사랑을 끝내지 않으면 영원히 그렇게 지속되며 서로를 망가뜨리리라는 것을. 나만이 끝낼 수 있었지. 잘못 생각한 게 있다면 내가 우리 관계를 정리했을 때 가장 덜 망가질 사람이 현이라고 생각했지. 그만은 새 삶을 살아갈 거라고 생각했어. 왜냐면 우리 관계에선 그만이 도덕적이었으니까.'
--- p.208
'10대 땐 무슨 생각을 했어요?
'20대가 되길 바랐어'
'20대 때는 30대가 되길 바랐나요?'
'......'
'10대 땐 20대가 되면, 20대 땐 30대가 되면 막막하고 불안한 마음이 치유되리라, 생각했거든. 무엇인가 든든한 것이 생겨서 아슬아슬한 마음을, 늘 등짝에 멍이 들어있는 것 같은 마음을 거둬가 주리라, 그렇게 부질없이 시간에 기댔던 것 같아. 20대의 어느 대목에선가는 20대가 참 길다고 생각하기도 했지. 격정은 사라져도 편안해지리란 이유로 어서 나이를 먹었으면 했어. 서른이 되면,혹은 마흔이 되면 수습할 길 없는 좌절감에서는 빠져나오지 않겠는가. 살아가는 가치기준도 생기고 이리저리 헤메는 마음도 안정이 되지 않겠는가. 그때 쯤이면 어느 소용돌이에도 휘말리지 않고 조용한 생활을 할 수 있는 힘이 생기지 않겠는가.'
'그런데요?'
'어리석었어. 무슨 생각으로 흘러가는 시간에 기댔을까. 시간은 밤에 문득 잠이 깨서 그저 가만히 누워 날을 새게 하거나, 현재진행형의 일들을 문득 지워버리고 집으로 돌아와 자버리게 하거나 했을 뿐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평화로워지기는커녕 이제는 무슨 일을 시작해서 실패를 하면 그 실패의 영향이 내내 앞으로의 인생에 상처로 작용하게 될 것 같아 살얼음판을 딛는 것같이 조심스러워. 어쩌면 인간이란 본래 이런 것일까? 본래 어느 구석이 이렇게 텅 비어 있고 평생을 그 빈 곳에 대한 결핍을 지니고 살아가게 되어 있는 것일까?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