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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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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6년 04월 15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240쪽 | 296g | 128*188*20mm
ISBN13 9788994054889
ISBN10 899405488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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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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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미리 루빈
Miri Rubin
영국 퀸 메리 대학의 중세사 교수이며 역사학과 과장이다. 중세 유럽의 종교 문화와 사회적 관계를 주로 연구해왔다. 저서로는 『자비와 공동체』(케임브리지 대학 출판부, 1987), 『예수의 몸: 후기 중세 문화의 성체상시』(케임브리지 대학 출판부, 1991) 『이교도 이야기』(예일 대학 출판부, 1999), 『하느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의 역사』(펭귄·예일 대학 출판부, 200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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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가 다시 조명을 받기 시작한 것은 계몽시대 이후의 일이었다. 중세 교회의 획일적 억압과 광신에 반대한다면서 계몽주의는 신성보다는 이성을, 저승보다는 이승을 더 중시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물극필반(物極必反: 사태가 극단적인 상황에 도달하면 정반대로 되돌아감)하여 결국 계몽주의는 프랑스 대혁명의 감정적 무지와 비합리적인 광신으로 이어져서 계몽이 아니라 반계몽을 낳았을 뿐이다. 이에 대한 반발로 낭만주의가 생겨났고, 낭만주의는 이성이 아닌 감성을 진실의 기준으로 삼았다. 사상의 추는 다시 한 번 크게 흔들렸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계몽주의적 외침은 루소의 “나는 심장의 두근거림을 느낀다, 고로 나는 인간을 이해할 수 있다.”라는 낭만주의적 주장에 밀려났다. 이처럼 낭만주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중세에 대한 동경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무엇보다도 중세 1천 년 동안 존속되어 온 그 엄정한 질서와 변화없음과 한결같음에 그리움이 생겨난 것이다. 우리는 중세라고 하면 교회의 지배 아래에 있는 세상, 봉건제에 의해 주군과 신하의 관계가 엄격하게 정립되어 있는 세상, 도시와 농촌의 생활환경이 근 1천 년 동안 변하지 않은 세상 등을 떠올린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외관에만 넘어가서는 안 되며 중세인의 삶이나 현대인의 삶이나 행복을 원하고, 향상을 추구하며, 원만한 인생을 바랐던 점은 똑같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중세 사람들이 실제로 살았던 환경에 집중하면서 특히 제2장과 제3장에서 중세의 생활과 기독교 사상을 살펴보고 있다.--- p.6

다른 많은 유럽의 개념들과 마찬가지로 중세라는 개념은 전 세계로 퍼져나가 유럽과 유럽인들에 대한 생각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세’는 대략 500년에서 1500년 사이의 기간을 탐구하려 할 때 사용하는 다소 어색한 용어이다. 그러니까 다른 두 중요한 시대에 끼인, 정지된 동작의 시대라는 그릇된 인상을 심어주는 것이다. 중세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사람들은 후대에 태어난 자신들의 가치와 행운을 엄청나게 과대평가한 사람들이었다. 중세(media aetas)라는 용어를 처음 쓴 것은 시인 페트라르카(Petrarch, 1304~1374)였고, 그다음 세기에는 레오나르도 브루니(Leonardo Bruni, 1370경~1444), 플라비오 비온디(Flavio Biondi, 1392~1463) 같은 정치가 혹은 역사가들이었다. 이런 정치가와 문인 들은 고대의 저작들과 사상에 집중하는 학문 방식을 만들어냈고 이어 그런 방식을 휴머니즘이라고 명명했다. 이런 사람들은 그들의 시대와 도시를 칭송했고 무엇보다도 서로 휴머니스트라고 부르며 칭찬했다.--- p.20

중세의 부활은 공화정 혹은 민주정에 대한 반작용일 뿐만 아니라 가톨릭 후원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것은 또한 국가적 정체성과 민족국가를 원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반영한 것이다. 이 무렵 국가는 언어, 역사, 풍경 등에 의해 규정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독일, 폴란드, 헝가리, 노르웨이 등에서 낭만적 민족주의를 추진하던 지식인들은 과거의 전통에서 19세기 민족적 정체성의 뿌리를 추구했다.--- p.27

무슬림이 시리아, 북부 아프리카, 남부 이탈리아, 시칠리아 등을 공격해와 판도가 자꾸 줄어들던 비잔틴 제국은 아주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제국의 북쪽과 북서쪽, 가령 불가르족, 폴란드족, 루스족들은 문화 확장의 대상이 되었다. 이들 지역에 그리스 선교사들은 기독교를 전파했는데 성스러운 형제인 키릴과 메토디우스는 각각 모라비아와 판노니아에 기독교를 전파했다. 비잔틴 문화는 교회의 의식을 통하여 퍼졌고, 또 선교사들이 발명에 기여한 새로운 알파벳에 의해 전달되었다. 이것은 나중에 키릴 알파벳으로 발전했고 오늘날 동유럽 전역과 아시아 일부 지역에서 사용되고 있다. 비잔틴 제국은 10세기와 11세기의 중부 아시아에서 발원한 셀주크족 같은 민족들의 이동으로 크게 파괴되었다.--- p.45

유럽은 중세 후반의 여러 세기 동안 형체나 인구 규모가 계속 바뀌었다. 발틱 지역은 13세기에 튜턴 기사단이 리보니아 지역을 점령하여 독일어를 말하는 사람들이 정착함으로써 유럽의 일부가 되었다. 그리스어를 말하는 비잔틴 제국은 1453년에 오토만에 정복당했다. 기독교도 통치자들은 알-안달루스의 대부분을 정복했고, 이 과정은 1492년에 그라나다가 함락됨으로써 완료되었다. 여러 인종과 종교적 종파들로 구성된 유럽인들은 헝가리, 오스트리아, 폴란드에서 몽골족과 맞섰다. 십자군들은 북아프리카의 정복과 성지의 재정복을 계속 상상했다. 십자군의 한 집단은 14세기 후반에 카나리아 제도에 들어가 교황의 축복 아래 그곳에 희미한 통치의 흔적을 남겼다. 14세기 이후 여러 세기 동안 유럽인들은 알렉산드리아, 다마스쿠스, 콘스탄티노플, 카라코룸, 예루살렘 등의 해외로 나가서 공동 거주지 혹은 무역 기지들(funduqs)에서 살았다. 무역로를 따라 순례자들도 순례의 길에 올랐고, 호기심 많은 학자들이나 자칭 선교사들도 그 길을 이용했다. 중세 말엽에 이르러 지중해 동부 지역은 오토만 왕조가 지배했고, 서쪽으로는 포르투갈의 왕들이 아프리카 해안 개발을 장려하면서 자금을 지원했다. 콜럼버스가 해상 여행을 떠나 ‘서인도제도’에 도착하는 1492년이 통상적으로 중세의 끝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유럽 여행의 전통, 지도 제작, 무역의 왕가 후원, 기독교적 사명감 등으로 인해 중세의 전통에 더욱 많이 빚지고 있는 사람이다. ‘중간’의 시대? 지금까지 해온 얘기로 살펴볼 때 그 ‘중간’이라는 개념에 무엇이 남아 있는가? 별로 남아 있는 게 없다.--- p.58

중세의 사람들이 우리와 아주 다른 것으로 종종 추정되고 있다. 이것은 그리 유용한 전제가 아니다. 지금이나 그때나 사람들은 가장 최선의 삶을 살려고 노력했고, 또 수지를 맞추려고 애썼으며, 사회적 제도들의 기대치에 부응하려 했고, 개인적 욕망을 충족시키려 했다. 과거의 사람들에게 자율권이나 선택의 영역을 부여하는 것?아무리 사소하더라도?은 역사가들이 그들에게 능동적 작용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작용을 고려한다는 것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요인을 무시한다는 뜻은 아니다. 첫째, 중세의 사람들은 기아, 질병, 폭력 같은 잔인한 현실에 대하여 통제 능력이 거의 없었거나 아예 없었다. 둘째, 과거의 사람들은 현대인과 똑같이 자의식을 가지고 있고 또 미묘한 감정과 복잡한 생각을 체험할 능력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일부 학자들은 12세기를 논하며 ‘개인의 발견’이라는 명제를 내놓았고, 또 18세기에 가족 내의 정서적인 유대관계가 탄생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살펴보겠지만, 우리의 자료들?유언장에서 시가(詩歌), 시각적 이미지에서 법정 증언에 이르는 다양한 자료들?은 사회 전 계층의 개인들이 우리와 유사한 정서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령 충성심, 질투심, 탐욕, 희망, 열정적 사랑 등이 공통되는 것이다.--- p.60

대부분의 중세 사람들은 가정에서 일을 하고 여가 시간을 보냈다. 도시든 농촌이든 사람들은 주로 가정에서 일을 했다. 농민의 농지에서 혹은 장인의 작업장에서 남자, 여자, 아이들은 함께 일했다. 가정은 친족들만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친척, 하인, 견습공, 심지어 가난한 자들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가정은 남자 가부장 밑에 조직되어 있었고 그가 부재할 경우에는 때때로 그의 아내가 가부장 역할을 대신 맡았다. 결혼은 가장 일반적이면서도 논쟁적인 사회제도였다. 로마법은 결혼을 하나의 계약으로 본 반면, 게르만 관습은 결혼을 가문의 일, 즉 젊은이들을 통한 두 가정의 동맹이라고 보았다. 결혼을 하면 그에 따르는 좀 덜 구속적인 동맹도 지켜야 했다. 이러한 전통에 기독교의 성(性) 도덕이 추가되었다. 기독교는 결혼을 유덕한 기독교적 삶의 기본 틀로 보았다.--- p.69

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농촌 정착지는 17세기부터 ‘봉건’이라고 알려진 토지 점유의 제도 위에 존재했다. 봉건이라는 용어는 토지가 수직적 제도에 의해 보유되는 형태를 가리켰다. 그러니까 봉신은 영주로부터 토지를 하사받고 그 대신 영주에게 충성심과 도움을 주는 형태로 보는 것이다. 영주와 봉신은 후자(봉신)가 충성을 맹세하고 이어 키스로 마무리하는 의식으로 굳게 맺어졌다. 이런 봉건관계에서 하사되는 토지는 여러 개의 영지로 구성될 수도 있었다. 가장 높은 수준에는 그 토지가 하나의 카운티, 공국, 혹은 왕국이었고, 그 영지 내에서의 인구, 천연자원, 사법 권한 등은 모두 봉신이 소유했다. 봉건관계는 헤브리디즈 제도(諸島)에서 헝가리, 토스카나에서 노르웨이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에서 발견되지만, 그 역사와 구체적 형태는 너무나 다양하여 ‘봉건주의’라는 용어로 전부 포섭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오늘날 역사가들은 ‘봉건주의’라는 용어를 제한적으로 사용하거나 아니면 그 용어를 아예 쓰지 않는다.--- p.87

도시들은 13세기에 들어와 금융 서비스가 아주 크게 늘어났다. 금융업의 왕조가 세워졌고 1300년에 이르러 유명 금융 가문들은 유럽 주요 도시들에 지점을 두었다. 그들은 부 덕분에 고향 도시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갖게 되었고, 또 해외로 널리 여행하는 동안에도 그 위세가 대단했다. 런던에만 10여 개 이탈리아 금융 가문들의 대리인들이 있었고, 이들의 자금 지원은 잉글랜드 국왕의 군사적 모험을 뒷받침했다. 상인과 은행가의 부는 이탈리아와 플랑드르 도시들의 거대한 저택에서 잘 드러났다. 친족 간의 충성심과 상인의 재능이 결부하여 엄청난 상업 가문을 만들어냈다. 이 당시의 가장 유명한 장거리 여행 상인은 베네치아 사람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였다. 그는 아버지 니콜로와 삼촌 마페오와 함께 중국 원나라 궁정으로 여행했다. 이런 여행은 상인 가문들이 어린 아들에게 상술의 비결을 가르치는 수련 과정이었다. 이 다소 예외적인 경우에, 그 여행은 24년간 지속되었고 마르코 폴로는 그 체험을 책으로 펴냈다.--- p.99

중세 사람들은 개인적 고행을 통하여 구제를 추구하고, 또 번잡한 일상생활을 벗어난 종교적 공동체에서 죄악과 싸우고 싶어 했다. 이러한 욕망으로 사람들은 엄청난 고행과 고립된 삶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것은 콜롬바누스의 생애에서 잘 드러난다. 수도원 내에서의 종교적 생활 규칙은 6세기에 수도자 누르시아의 베네딕트(Benedict, 480년경~547년경)에 의해 제정되었다. 움브리아 지주 계급의 아들로 태어난 베네딕트는 교육을 마친 후 고독 속의 종교적 수행을 떠났고, 그리하여 수비아코 주위의 산속에서 여러 해를 살았다. 그는 이 지역의 종교적 공동체들을 창설하고 인도했으며 529년부터는 몬테 카시노에서 그 자신의 수도원을 경영하면서 그가 작성한 생활 규칙을 철저히 준수했다. 그의 규칙은 기독교적 완성의 모범이 되었고, 이 수도원의 지속적인 생활 방식은 곧 유럽 전역의 수백 개 수도원들에서 따라하게 되었다.--- p.121

12세기에도 통치자와 주교들 사이에서 유사한 갈등이 발생했다. 주교들은 교회의 ‘자유’를 외치며 정신적 문제의 자율권을 주장했다. 교황과 황제의 갈등은 때때로 교황의 선택에서도 의견이 분열되는 사태를 가져왔다. 1159년에 유럽의 통치자들이 소집되어 두 명의 교황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두 교황은 알렉산더 3세와 빅토르 4세인데 둘 다 로마 추기경들에 의해 선출된 바 있었다. 알렉산더 3세는 신성로마황제인 프리드리히 1세와 그를 지지하는 제국 주교들을 제외한 모든 주교의 지지를 받는 아주 유능한 사법가이면서 행동가였다. 이러한 분열과 기능부전은 아주 심각한 현실적 결과를 가져왔다. 대분열 동안, 신자들이 내는 십일조는 누가 수령할 것인가? 누가 주교를 임명할 것인가? 로마에 호소된 사건들은 누가 결정할 것인가? 같은 문제들이 불확실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p.138

구원의 드라마가 설교, 예술 작품, 의례의 형태로 교구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11세기의 수도원들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현양하고 고통받는 하느님에 대한 공감을 일으키는 예배 행위가 널리 보급되었다. 이러한 예배는 탁발 수도사들의 설교를 통하여 도시의 사람들에게도 전해졌다. 프란체스코 자신은 몸에 다섯 군데의 성흔(stigmata: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가 두 손, 두 발, 옆구리에 입은 것과 똑같은 상처)이 생김으로써 그 자신을 독특하게 그리스도와 동일시했다. 신자들은 하느님의 슬픔과 그것을 슬퍼하는 어머니(그림 11)와 그들 자신을 동일시하도록 권장되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런 수난을 재연해보기까지 했다. 예배의 시가(詩歌)를 암송하는 종교 클럽에서는 회원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고행을 직접 느끼기 위해 자신의 몸에 채찍질을 가했다. 기독교 신자들은 사순절과 성 주간에 십자가형에 대하여 더욱 뼛속 깊이 느끼게 되었고, 그리하여 기독교인과 유대인의 차이를 더욱 절감하면서 유대인에 대하여 학대와 폭력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을 보였다.--- p.154

11세기와 12세기에 기독교 왕권의 위력이 잘 확립되자 대부분의 왕궁은 수도에 자리를 잡았다. 이것은 몇 세기 전 샤를마뉴가 아헨에 수도를 정한 것과 비슷했다. 윈체스터와 이어서 웨스트민스터는 잉글랜드 왕들의 수도였고, 파리는 프랑스의 수도, 크라쿠프는 카시미르 1세 치하의 폴란드 수도, 후에스카는 아라곤 왕 라미로 1세의 수도가 되었다. 신성한 왕들이 어느 한 장소를 선호할 때에도 왕들의 여행은 계속되었다. 잉글랜드의 왕실 수행원들이 13세기 후반과 14세기 초에 스코틀랜드의 전역(戰役)에 따라갔을 때, 몇몇 정부 부처는 웨스트민스터에 남았다. 그렇지만 아주 중요한 문서보관서와 상당수의 인원은 왕을 따라 갔다. 수도는 정의, 교육, 교회의 후원 등 기독교적 통치와 관련된 책임과 위엄을 보여주는 곳이었다. 수도는 성유물의 보관소이면서 외교관들의 리셉션, 축일의 행진, 승전의 축하 등 국가 예식의 무대였다. 사후에 성인으로 시성된 루이 9세(Louis IX, 1214~1270)는 예수의 가시관을 보관하는 성물 보관소로 생트 샤펠 예배당을 짓게 했다. 그는 1204년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할 때 획득된 물건들 중에서 이 가시관을 선물로 받았었다. 장엄한 고딕 건물인 이 예배당은 왕의 합창단인 소년 성가대의 음악으로 흘러넘쳤다. 잉글랜드의 헨리 3세가 개축한 웨스트민스터 사원도 역시 장엄했다. 이 건물은 고백왕 에드워드 시절부터 내려오는 왕권의 연속성을 강조하고, 또 모든 로마적인 것에 대한 기독교의 보편적 충성심을 보여준다. 심지어 1268년에 이탈리아 화가들이 제단 앞에 제작한 모자이크 길까지도 그것을 드러내고 있다.--- p.166

유럽의 단합은 강, 도로, 해안선 등의 운송수단과, 널리 퍼진 기독교 문화에 의해 촉진되었다. 기독교는 유럽의 풍경에도 영향을 미쳤다. 북부 유럽의 경우 여행자들은 멀리서도 높이 솟은 고딕풍의 대성당들을 볼 수가 있었다. 유럽의 도로에서는 성스러운 복장 혹은 참회하는 쇠사슬을 몸에 걸치고 걸어가는 개인들을 볼 수 있었다. 행렬들이 내는 찬송과 종소리 또한 소리의 장관을 이루었다. 심지어 도시에서도 그런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그러나 사순절 때 도시의 거리에서는 고기 굽는 냄새가 사라졌다). 유럽의 정체성은 유럽이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것 못지않게 거부하는 것에 의해서도 결정된다. 그리하여 공포와 불안, 증오와 혐오의 대상들이 이 역사의 한 부분을 형성한다. 기독교는 구원에 의한 희망, 구제로 가는 길 등의 메시지를 가르친다. 기독교 단체 밖에 있는 사람들은 죄악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고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남들에게도 위협이 된다. 카롤링 신학자이며 궁정신하인 흐라바누스 마우루스(Hrabanus Maurus, 780경~856)는 이교도의 신들을 악마라고 규정했다. 이 악마는 “사람들에게 신전을 지으라고 설득할 수도 있고… 그 자신을 위한 제단을 지으라고 하고서 그 위에 동물이나 사람의 피를 뿌리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기독교화를 통하여 예전의 사회적 관습들은 사라졌으나 부분적으로 기독교권에 편입되기도 했다. 개종 후의 1세대들은 기독교 예식과 이교도의 방식을 공존시키려 했다. 헝가리 통치자 게자(997 사망)는 972년에 기독교로 개종하고서 백성에게 개종을 권했지만 동시에 “전능하신 하느님과 기타 잡신들에게 희생을 바쳤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그의 아들 스테판(1038 사망)은 1000년부터 헝가리의 왕으로 다스렸는데, 기독교를 열성적으로 믿고, 또 성모 마리아에게 헌신한 성인으로 경배되고 있다.--- p.198

책은 신약과 구약에 바탕을 둔 기독교를 상징한다. 기독교 전통의 핵심적 인물들은 언제나 책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가령 마가, 마태, 누가, 요한 등의 4복음 기자와 교회의 아버지인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책을 든 모습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책은 점점 더 전례나 개인 예배 등 성경의 보존과 활용을 위한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복음은 개종의 시기에 통치자들에게 주는 선물이었는데 가령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복음이 그러하다. 이 복음은 로마에서 잉글랜드로 선교사들을 파견할 때 주어 보낸 것이었다. 책들은 유익했고, 또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었다. 서기 1000년 이전에 대부분의 책들은 수도원이나 대성당의 도서관, 그리고 왕실의 보물 창고 등에 보관되어 있었다. 왕궁은 종종 지방으로 옮겨 다녔는데 계절에 따라 소재지가 달라졌다. 그럴 때마다 중요한 책들은 궤짝에 넣어져 이동되었고 왕실 목사가 그 관리를 맡았다. 책들은 상아, 귀금속, 좋은 가죽 등으로 만들어진 값비싼 제본으로 보호되었고 종종 보석과 진주로 장식되기도 했다. 책들의 내용은 종종 수도원 식당에서 식사 중에, 귀족들의 연회장에서, 개인 예배당 등에서 목사들에 의해 큰 목소리로 낭독되었다. 책은 중세 말기에도 진귀한 물품이었으나 중세 말기에 인쇄술이 발명되면서 책의 편재성·가시성·접근성이 획기적으로 높아졌다.--- p.218

궁정은 생활 양식, 종교적·문화적 흐름에 영감을 주고, 또 풍습에도 영향을 주었다. 궁정은 사치품과 문학을 생산하고 과시하는 곳이었다. 특히 시는 남녀 청중의 즐거움을 위해 암송되면서 공연되고, 또 때로는 노래로 불리기도 했다. 궁정은 아더 왕의 전설을 연극으로 공연하기 시작했고, 그 전설이 묘사하는 경쟁, 사교성, 상사병, 젠더 역할 등을 경쟁하려 했다. 사람들은 아더 왕 전설 속의 유명인사들?아더, 랜슬롯, 귀네비어?의 이름을 가져와 자신들의 이름으로 삼기 시작했고, 그들을 중심으로 한 마상 시합과 축제를 조직했다. 이러한 놀이정신은 여러 세기 동안 유럽 엘리트들의 특권이었고 20세기에 들어와서는 글로벌한 놀이마당을 마련해주었다. 중세 로망스의 궁정노래는 구애, 동경, 세상의 청춘에 대한 자기 이해(理解) 등의 언어를 제공했다. 그것은 또한 역할놀이, 게임, 문학, 영화 등을 통하여 상상력의 광대한 공간을 채워주고 있다.
---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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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 피해보상
  •  상품의 불량에 의한 반품, 교환, A/S, 환불, 품질보증 및 피해보상 등에 관한 사항은 소비자분쟁해결기준(공정거래위원회 고시)에 준하여 처리됨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
  •  대금 환불 및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금 지급 조건, 절차 등은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라 처리
  • 절판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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