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사진에서 활동한 전쟁사진가들은 사진병과 민간 보도사진가들로 구분되는데, 특히 전자의 중심 피사체는 아군의 활동이다. 미군이나 한국군, 기타 유엔군의 장군, 장교, 사병을 대상으로 하여 다양한 상황에서, 예컨대 작전회의, 전투, 휴식, 식사, 훈장수여 등의 상황을 인물 중심으로 클로즈업한다. 물론 피사체가 인물이 아닌 사물인 경우도 많다. 기지 내 건물, 전력 · 통신 · 교통 · 항만시설, 무기체계, 수송과 보급, 다양한 작전의 결과 등을 포착한 것이 이에 해당한다. 예외적이지만, 피사체가 적군인 경우도 상당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경우 사진은 주로 적의 파괴행위, 특히 잔학행위의 결과들을 클로즈업한다. 미군 사진부대는 이러한 사진들을 많이 찍었고, 이에 대한 정보 및 내용 캡션을 상세히 달았다. 그러나 아군의 잔학행위 결과들은 미군의 전쟁사진에서 누락되어 있다. 예컨대 한국 군경에 의한 정치범 · 보도연맹원 · 부역자 학살이나 미군에 의한 대민(간지역) 폭격과 기총소사 등 유엔군의 잔학행위들은 사각에 속하기 때문이다. 사각 또한 사회적으로 결정되기도 한다. 사진을 찍는 것이 금지된 대상이 있고, 또한 사진을 찍었다고 하더라도 작전상, 또는 전략적으로 유통을 금지시키는 경우가 많다. 사진이 검열로 지워지고, 배포가 금지되는 것은 사회적 차원의 사각이 존재함을 보여 준다. (72~73쪽)
9월 9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트루먼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승인되었다.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제7함대가 투입되었고, 상륙 부대는 미 해병 1사단, 7사단, 한국군 17연대와 해병대였다. 총 260척의 함정이 동원되었다. 9월 15일 새벽 해병 5연대 3대대가 월미도(녹색해안)에 상륙했고, 늦은 오후 5연대와 1연대가 각각 인천 전면 방파제인 적색해안과 인천 남쪽 긴 방파제가 있는 청색해안에 상륙했다. 제2차 세계대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이은 최대의 상륙작전이었던 만큼 수많은 사진병과 민간의 전쟁사진가들이 작전에 참여했다. 미 공군, 해군, 해병, 육군의 사진병들이 전부 사진 활동에 참여한 최초의 작전이었다. 그런 만큼 인천상륙작전의 사진은 전쟁 스펙터클의 백미라 할 수 있다. (111쪽)
전쟁사진에서 군 못지않게 등장하는 피사체가 바로 민간인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미군 사진병의 시선은 민간인과 포로, ‘자유피란민’과 ‘불순분자’, 애국자와 ‘부역자’의 사이에서 상당히 혼란스러워한다. 민간인과 전쟁포로 사이의 혼동은 앞서 전쟁포로로서의 적의 재현에서 잠시 살펴본 바 있다. 이는 사실 전시의 적과 잘 구별되지 않는 민간인에 대한 시선의 문제이다. 왜 이런 혼동이 발생할까? 미군의 인종주의적 시선에서 볼 때 남한과 북한 사람 모두 검은 눈의 낯선 이방인일 뿐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한국 민간인 피란민에 대한 인식과 이에 기반한 정책이었다. 즉 미군은 전쟁 초기 민간인을 민간 복장을 한 적으로 의심했고, 민간인 이동제한 정책의 일환에서 발포 · 사살하는 정책을 수립하기도 했다. (148~149쪽)
‘부역’이란 역도에게 협력한 것을 의미한다. 즉 국가에 반역이 되는 일에 동조하거나 가담한 행위를 말한다(이임하, 2011: 143). 그렇다면 38선 이남이 유엔군에 의해 ‘수복’된 상황에서 부역자란 누구인가? 문제는 어떤 행위가 역도에게 협력한 것인지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전혀 제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도강파’는, 피신한 자와 지하운동을 한 자를 제외하고, 피란 갈 의사가 있었으나 사정상 가지 못한 사람과 피란 갈 의도가 없어서 그대로 남아 있던 사람들 모두 부역자로 간주했다. 이후 ‘주동적’(적극적)이냐 ‘피동적’(소극적)이냐에 따라 부역처벌을 달리하겠다는 방침을 형식적으로 세우기는 했지만, 소극적 또는 비자발적이었다는 판정을 받더라도 부역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 사태를 예감해서였을까? 한국군과 유엔군이 입성하는 지역에는 모든 주민이 나와 태극기를 휘날리며 환영했다. 이들은 실제로 적으로부터의 해방을 환영하는 사람들과 함께 마치 부역하지 않았음을 입증하려 비자발적이었다는 판정을 받더라도 부역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 사태를 예감해서였을까? 한국군과 유엔군이 입성하는 지역에는 모든 주민이 나와 태극기를 휘날리며 환영했다. 이들은 실제로 적으로부터의 해방을 환영하는 사람들과 함께 마치 부역하지 않았음을 입증하려는 듯이 열렬히 환영했다. (161~162쪽)
여기에서 우리는 주로 미국의 ‘시각’이 반영된 미군 사진병이 찍은 사진을 중심으로 살펴보았기 때문에 미국의 ‘사각’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의 사각을 보완할 수 있는 다른 시각의 사진들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대체로 한국전쟁에서 적대적 관계에 있던 중국과 북한의 시각이 미국의 사각에 대응하며, 이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이 필요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 책에서는 ‘그들’이라는 시각 차원에서 중국에서 출간된 한국전쟁 사진집의 시각을 다루었다. 중국 해방군화보사가 집성한 이 사진들은 중국인민지원군 군속사진가들이 찍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국 당안관이나 군관계 사진 아카이브(Archive)가 거의 개방되지 않은 상황에서, 또한 중국군 사진대의 조직, 성원, 임무, 활동 등에 대한 연구가 거의 전혀 없는 실정에서 중국의 한국전쟁 사진과 시각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에는 커다란 제약이 있다. 같은 이유로 북한이 찍은 한국전쟁 사진들도 다루지 못했으며, 접근하기조차 어려웠다. 다만 이 책에서 다룬 미군 포로들이 평양 시가지를 행진하는 모습과 휴식을 취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은 북한 측 선전대 사진가가 찍은 것을 활용할 수 있었다. 이렇게 미군이 북한 지역을 점령해 가면서 노획한 (북한군이 생산한) 사진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접근이 가능하다. 또한 공산계열의 언론, 특히 동유럽 공산국가에서 발행되는 신문 · 잡지에 실린 한국전쟁 사진들 가운데에는 북한과 중국의 군속사진가들이 찍은 사진들이 다수 발견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단기적으로는 그들의 시각 분석을 어느 정도 보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중국과 북한의 전쟁사진 아카이브가 개방되어야 이 문제가 완전히 해소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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