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고백이요? 그거 고백 아니에요.” 모연은 거짓말 못하는 아이처럼 말까지 더듬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시진은 자신이 그동안 눈 뜬 봉사였음을 깨달았다. 눈으로 볼 수도 있었던 진실을 그저 귀로만 들으려 했던 것이었다. 인주를 바른 듯 새빨개진 모연의 얼굴은 그의 가슴팍에 ‘좋아요’라고 새겨진 도장을 찍었고, 블랙홀처럼 검게 소용돌이치는 그녀의 눈빛은 그를 온통 집어삼켜버렸다. 그녀의 진심을 확인한 시진은 전 우주를 소유한 듯 가슴이 벅차올랐다. --- p. 11
아버지가 그녀의 짝으로 염두에 둔 사람은 처음부터 유시진 대위였다. 집안이 군인이라는 것과 육사 출신에 앞날이 보장된 청년이라는 이유였다. 하지만 명주는 시진을 군인으로 존경했고 선배로 동경했을 뿐, 남자로 느낀 적은 없었다. 몇백 번 눈을 마주쳐도 어떤 찌릿함을 느끼지 못했다. 대영은 달랐다. 단 한 번이면 족했다. 그의 슬픈 표범 같은 눈을 본 순간, 그녀는 그에게 감전되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딸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않았다. 아버지는 대영을 불러 그녀와 헤어질 것을 명령했다. 아버지로서도 군인으로서도 월권을 행사한 것이 다. 뒤늦게 이 사실을 확인한 명주는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녀가 한국을 떠나 우르크로 온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내 걱정은 하지 마시지 말입니다.” 아버지를 기다리는 동안, 대영이 명주의 손을 가볍게 잡으며 달래듯 말했다. “안 합니다. 뭐 이쁘다고.” --- p. 45~46
“이건 잊어요.” 시진은 죽을힘을 다해 몸을 일으켜, 한 손으로 모연의 눈을 가리고, 그대로 몸을 틀어 아구스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세 개의 총알은 정확히 아구스의 급소에 가서 박혔다. 라이언 일병이 최후를 맞이한 것이었다. 시진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듯 누워 눈을 감았다. 머릿속으로 누군가의 얼굴이 스냅사진처럼 떠올랐다. 시진과 아구스를 구조하다가 목숨을 다한 김진석 대위의 마지막 얼굴이었다. 그가 시진을 향해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시진의 꼭 감은 눈에서 한 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 p. 131
배에서 먼저 내린 시진은 모연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녀는 그의 손에 이끌려 미끄러지듯 해변으로 걸어갔다. 발목 아래로 바닷물이 넘실거렸다. ‘알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바닷물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삶들을 적셔왔을까.’ 모연은 어쩐지 삶의 한 막이 완결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일은 새로운 삶이 펼쳐질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삶 속에도 시진이 있을 터였다. 그런 생각을 하자 가슴이 벅차올랐다. “진짜 다시 돌아왔네요.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