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의 기일이 다가왔다. 그가 청춘을 다 바쳤던 국가는 계절이 바뀌기도 전에 그의 이름을 잊었지만, 그녀는 그를 잊을 수 없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 시진은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 분명했고, 모연은 끝끝내 그에게 사망선고를 내리지 못할 터였다. ---「프롤로그」중에서
아카시아가 피고 지고, 은행이 무르익고, 낙엽이 떨어지고, 눈이 내리는 동안 그들은 사랑에 빠졌다. 사랑하지 않았을 때는 문제되지 않았던 것들이 사랑함으로써, 그 사랑이 진짜다 싶어질 무렵부터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가령 명주가 특전사령관의 무남독녀 외동딸이라는 것. 그녀는 의사이자 대위이고, 그는 검정고시 출신에 중사라는 것. 그녀의 아버지가 그를 마뜩지 않아한다는 것. 계절이 몇 번 더 바뀌고, 그녀를 향한 감정이 좀 더 깊어졌을 때부터 그는 명주를 피하기 시작했다. --- p. 26~27
“아신다니까 하는 얘긴데, 사실 이거 노르망디에서 난 상첩니다. 그때 진짜 총알이 비처럼 쏟아지는데, 그 총알을 뚫고 전우를 구하러 갔죠 제가.” 시진은 부러 심각한 어조로 설명했다. 모연은 한동안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혹시 그 전우 이름이 라이언 일병인가요?” 잠시 후 그녀가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 순간 시진이 픽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솔직하고, 불의에 정정당당하게 대응할 줄 알고, 사과할 때 정확히 사과할 줄 알고, 유머를 유머로 받는 센스까지 겸비한 모연이 신기했다. --- p. 39
모연은 얼굴에 엉망으로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내며 멀어지는 헬기를 바라보았다. 12시 땡 하고 사라진 신데렐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왕자의 마음이 이랬을까. 모연은 신데렐라의 구두 한 짝 같은 약속만 남기고 사라진 시진이 이상했고, 신기했다. 한창 재미있는 장면에서 ‘다음 편에서’라는 자막과 함께 끝내버리는 드라마처럼 야속했고 궁금했다. --- p. 51
“되게 먹고 싶은가 봐요.” 모연이 그의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을 했다. “방법이 없진 않죠.” 시진의 손이 그녀의 턱에 닿았다. 그녀에게서 와인의 달콤한 향내가 풍겨왔다. 그의 입술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모연의 입술에 닿았다. 그녀의 입술에서 와인 맛이 났다. 그는 천천히 입술을 떼어냈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꼭 감긴 눈꺼풀에 머물렀다. 길고 짙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이내 밤하늘처럼 까만 눈동자를 드러냈다. 긴 눈맞춤이 이어졌다. 그는 그 순간 그녀의 심장도 그와 같은 속도로 뛴다고 확신했다. 그의 마음에 쏟아지는 빗줄기가 그녀의 마음도 적시고 있다고 느꼈다. 시진의 입술이 다시 한 번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 순간, 모연이 고개를 살짝 내리며 그의 입술을 피해버렸다. 영화가 끝난 상영관에 번뜩 불이 들어오듯, 모든 현실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 p. 157
“잘했어요, 오늘.” 그의 위로에 그녀의 멈췄던 눈물이 이내 다시 흘러내렸다. “뭐 대답을 들었어야 눈물이라도 닦아주지.” 그가 말을 하면 할수록 그녀의 눈물은 솟구쳤다. 속수무책이었다. 그동안 그녀 안에 잠재되어 있던 슬픔의 덩어리가 치받쳐 올라오고 있었다. 그는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그녀 곁에 서 있는 것뿐이었다. 얼마쯤 지나자 그녀의 울음소리가 잦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