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나선정벌 주요 사항과 「북정록」
― 삼전도의 치욕을 지켜보았으며, 청으로 끌려가 볼모 생활까지 한 조선 효종은 왕위에 오른 뒤 훈련도감 병력 1만 명, 어영청 병력 2만 명 증강을 목표로 군사력 강화를 추진. 단 청이 눈치 못하도록 극비리에 사업 진행.
― 청은 제1차 나선정벌 이듬해인 1655년 밍안달리(明安達禮)의 대군을 출동시켜, 헤이룽 강 상류 쿠마르스크 요새에서 치열한 진지전을 벌임. 그러나 현지에서 월동하며 전력을 보강한 스테파노프가 이끈 러시아 원정대에게 대패.
― 1657년(효종 8년) 스테파노프 군이 쑹화 강을 거슬러 내륙 깊숙이 침투하여 접전이 벌어짐. 이에 당황한 청은 현지 사령관 사르후다(沙爾虎達)의 주관 아래 대규모 반격 작전을 준비. 사르후다는 병력과 화력의 증강, 수상전을 위한 대형 선박 건조를 추진하는 한편, 화력 보강을 위해 자국군보다 우수한 조선군 포수(소총부대) 출병을 요구하기로 결심.
― 1658년(효종 9년, 청 세조 순치 15년) 3월 파병 부대 작전 기간에 필요한 약 5개월 소요 군량을 비롯한 일체 군수품과 전투병력 2백 명 요구: 러시아 원정대가 제1차 나선정벌 당시보다 한층 강화된 군사력을 동원해 헤이룽 강으로 진출했으므로 이를 공략하는 데 더 많은 조선군 포수가 필요했음.
― 효종은 원정군의 장거리 수송비용 절감 대책으로 식량보다 종이나 담배 등, 부피가 작고 현지에서 높은 가격으로 식량과 교환할 수 있는 잡화를 보급하려 했지만 청이 이를 거부함.
― [일기 시작] 함경도 북병마절도사 김시성의 추천에 따라 함경도 북병마우후 신류를 파병부대의 영장, 즉 사령관에 선임.
― 4월 6일, 회령부에서 포수들의 사격훈련 실시, 표적 명중 51명, 21일 재사격 훈련. 4월 30일, 청국 통사 도착, 군량 일부 두만강 이북으로 수송, 대기.
― 1658년 5월 1~2일, 회령에서 두만강 도하, 제1차 변급 원정대의 행군로를 따라 북상. 강행군, 일부를
후속대로 남겨두고 선발대 편성, 5월 9일 해질녘에 닝안 인근 도착, 청군과 합류, 다시 10일 아침부터 행군, 11일 선박으로 이동하기 위해 포수 200명이 청군 8명의 지휘 아래 각각 24명씩 분산 탑승. 12일 새벽 무단 강 하류로 항진 개시. 15일 쑹화강 합류 지점 일란 도착. 선박 이동 간에 분산 탑승했던 포수들을 원대복귀, 재편성.
― 14일 입수된 정보에 따라 러시아 군 선단이 헤이룽 강 하구에 집결한 사실 확인. 조선-청 연합군은 쑹화 강 상류에서 건조된 50여 척의 전선이 도착할 때까지 대기, 휴식과 훈련, 전열 정비. 청군 지휘부 요청으로 세 차례 사격 훈련 실시, 17일 40명 표적 명중, 18일에 1발 사격으로 65명이 표적 명중. 닝안
참전 청군 포수 1백 명은 조총 사격이 서툴러 조선군과 대조적. 21일, 60보 3발 사격에서 좌초 100명 중 67명이 명중(3회 명중 3명, 2회 명중 8명), 우초 100명 중 56명이 명중(3회 2명, 2회 13명). 대기하며 주민들로부터 러시아 원정대 동향 첩보 수집, 25일 러시아 전선 11척 헤이룽 강 하구 도착, 뒤따라 또 다른 11척이 계속 항진중이라는 미확인 첩보 입수. 중순보터 월말까지 약 보름간 대기, 한발로 쑹화 강 유량 감소, 가뭄과 강풍으로 기후 건조.
― 6월 2일 전선 도착, 지휘용 상선 4척, 대중선 36척, 중소선 12척, 도합 52척에 중소형 화포 50문 장착, 화포수 100명 배치. 6월 3일부터 출동 준비. 조선군의 휴대 군량 3개월분 중에서 1개월분 소모, 청군으로부터 40일분 차용. 대기 도중 부상자와 환자, 승선 인원 초과로 도합 5명 탈락, 귀환 조치. 실제 참전 병력은 260명. 198명의 포수를 25명 단위로 8개 부대에 배속, 전선 1척 당 5명씩 분산 배치.
― 선단 구성은, 좌초관 박세웅, 대통관 김대헌의 전함을 선봉대로, 우초관 신성일, 대통관 이몽선의 전함을 후영으로 배치. 조선군 사령관 신류의 지휘선과 청군 사령관 사르후다의 지휘선은 후영에 편성. 5일 새벽 출항, 순풍으로 쑹화 강 하구를 향해 급속 항진, 약사마을에 도착. 육로로 8일 행군 여정의 장거리를 한나절에 주파. 다시 하류로 더 진출 강변 마을 경유, 10일 저녁 무렵 쑹화 강-헤이룽 강 합류 지점, 강폭이 매우 너른 하구에서 한복판을 차단 중이던 러시아 선단 11척과 조우, 전투 개시.
― 전투 결과 적선 7척을 소각. 잔여 4척을 포위 감시한 채 헤이룽 강 대안에 집결 밤을 새움. 그러나 야음을 틈타 러시아 패잔병 95명이 전선 1척에 승선, 탈출, 결국 3척만 노획. 6월 10일 전투에서 러시아 군은 사령관 스테파노프를 비롯하여 270명 전사, 나머지 패잔병과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던 선발대 병력 227명이 전장을 겨우 탈출하는 대참패.
― 조선군 측 인명피해는 전사 7명(8명), 중상 15명(14명), 경상 11명. 청군은 보병 80여 명, 수군 30여 명이 전사, 200여 명이 부상. 11일, 전장 정리, 12일 러시아 투항병 10여 명 수용, 일부 강 북안에 상륙 수색, 13일 쑹화 강 하구로 귀환 휴식. 14일 쑹화 강 상류로 10일 간 항진 끝에 24일 무단 강과 합류 지점 일란으로 귀환. 청군 사령관은 파병부대를 현지에 계속 주둔시키려 함. 조선군은 7월 중순까지 야영. 군량 수급 대책이 절박해짐. 청 통역관들이 협조하지 않고 오히려 농간을 부려 조선군을 곤혹스럽게 만들었으나, 신류의 외교술로 8월 4일 귀국 허락을 받아 주둔지 출발, 13일 닝안 도착. 또다시 청군 사령관의 요구로 지체. 8월 18일 베이징으로부터 공문 도착. 겨우 귀국길에 올라, 8월 26일 두만강 북안에 도착, 2일간의 도하 끝에 8월 27일 저녁 조선 행영으로 귀환. [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