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학교 철학과. 중고교 시절부터 문단의 주목을 받아왔다. 문학성을 겸비한 흥미로운 서사로 그동안 천마문학상, 계명문화상, 청년토지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2008년 『직녀의 일기장』으로 5천만 원 고료 제2회 세계청소년문학상을, 2009년 『구슬똥을 누는 사나이』로 제3회 디지털작가상 대상을 받았다. 소설집 『즐거운 장난』 『주인님, 나의 주인님』, 장편소설 『시계탑』 『팬이야』 『김종욱 찾기』 『앤』 『한 달간의 사랑』 『헬로 미스터 찹』 『간호사 J의 다이어리』 등이 있다.
“사시사철 없이 봄뿐인 여인들의 섬이 있습니다. 밖에는 눈보라가 몰아쳐도 그 안에서는 진달래며 목련이 피는 섬이요.” “시방 장난질혀? 그 전설의 고향에서 나온 섬 말하는감?” 박성우는 그림에서 시선을 떼고 김 노인의 눈을 들여다본다. 청명한 기운이 도는 두 눈과 마주치자 찬 것을 씹지 않고 삼킨 듯 명치끝 시린 느낌이 들어 김 노인은 자기도 모르게 움칠한다. “그곳을 간 사람들은 그 섬을 미인도(美人島)라고 부릅니다.” --- p.16
성우는 집 안을 샅샅이 뒤졌다. 사람이 다녀간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귀신에 홀린 것이리라. 석연치 않은 머릿속과 달리 몸은 이상하리만치 가볍고 상쾌했다. 그는 오늘 저녁에야말로 요사스러운 것의 정체를 밝히겠다고 단단히 벼르고는 해가 저물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밤을 새우고 다음 날이 되도록 집은 잠잠했다. 사흘이 지나자 필중이 돌아왔다. 성우는 약속된 사례비를 받고 어정뜬 심정으로 그곳을 떠났다. --- pp.24-25
성우는 가슴이 들레는 한편으로 속이 아뜩해졌다. 여인을 들쳐 업고 데려가 으스러질 때까지 손목을 움켜쥐고 싶다는 충동이 솟구쳤다. 바락바락 화를 내는 그녀를 몸 아래 깔고 성내는 모습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여인이 종주먹으로 가슴팍을 두방망이질한다면 피하거나 저지하지 않고 고스란히 그것을 다 맞고 싶었다. 성우는 이성을 뚫고 회오리처럼 몰아치는 욕정에 당황했다. --- pp.46-47
“섬에 흘러드는 사내들을 후리며 제 미색을 뽐내기 바쁘지만 알고 보면 아주 불쌍한 것들이라고. 죽어라 정분질을 하지만 결국 사내들은 지들을 떠나거나 눈이 멀어버리거든. 백년해로라는 게 없지. 히히. 따지고 보면 내 팔자가 제일 기구하지만서도. 남들이 모르는 걸 혼자 안다는 게 얼마나 미치고 환장할 일인지 넌 모르지? 난 네가 찾아오리란 것도 일찍부터 알고 있었어. 넌 이곳에 와선 안 될 놈이었거든.” --- pp.83-84
매화들이로 돌아와 잠든 그는 꿈속에서 다시금 의문의 여인을 만났다. 여전히 얼굴을 내비치지 않은 그녀는 안타까운 손길로 성우의 벗은 몸을 쓰다듬고 있었다. 성우는 그것이 자신을 향한 월화의 속내일 거라 확신했다. 원래 앙큼한 여자애들은 호감을 품을수록 남자에게 더 쌀쌀맞은 모습을 보이지 않던가. 이는 선뜻 종민을 버리지 못한 채 자신을 힐끔거리고만 있는 월화에게 먼저 다가가라는 일종의 계시이다! --- p.99
귓가에 맴도는 낯선 목소리와 함께 성우는 소스라치듯 놀라 깨어났다. 가슴이 심하게 요동쳤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분명하게 눈앞을 스쳐간 여인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성우는 그 잔영이 지워지기 전에 황급히 붓을 집어 들고 숨도 쉴 새 없이 여인의 얼굴을 그려내기 시작하였다. 화선지 속에 담긴 여인의 얼굴은 분명 월화가 아니었다. 대체 이 여자는 누구란 말인가. 성우는 왜 심장이 세차게 떨려오는지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손끝으로 그림 속 여인의 얼굴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 p.128
노란색 치마가 허공에 펄럭였다. 입을 살짝 벌린 소향의 의아한 얼굴. 성우는 허공에 붕 뜬 소향과 눈이 마주쳤다. 찰나의 시간이 영원 같았다. 성우가 아뜩하게 내려앉은 가슴으로 몸을 벌떡 채 일으키기도 전에, 소향의 몸은 꽃떨기처럼 맥없이 벼랑 아래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바다는 아귀의 입처럼 억센 파도로 소향의 몸을 흔적 없이 삼키었다. 야속하게도 바닷물 위로 옷자락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 p.149
“벼랑 아래 바다는 매일 똑같은 바다가 아니야. 이히히. 남자가 여자를 탐하고 섬을 떠나는 밤에는 바닷물 속에 문이 열리지. 그때가 유일한 기회야. 다른 사내가 벼랑에 몸을 던지는 순간, 너도 이곳 계집을 끌어안고 문이 닫히기 전에 뒤따라 뛰어내려야만 해. 조금이라도 때를 놓쳤다가는 둘 다 죽은 목숨이라는 건 너 같은 멍청이라도 알 만하겠지? 히히.” --- pp.172-173
“한바탕 비가 내린 뒤 개고 나면 이곳 여인들은 이 일에 대해 기억하지 못할 것이오. 비가 그치기 전에 저 호수 속으로 몸을 던지시오.” “이대로 갈 수는 없습니다.” “만에 하나 그대가 이곳의 기억을 간직하기를 간절히 바란다면 세월의 흔적을 품고 노인이 된 채로 제 세상에 가게 될 것이오. 그러니 첫 번째 왔던 때처럼 모든 것을 잊도록 하시오.” --- p.181
“하나만 물어봅시다.” 늙은이가 문손잡이를 잡은 채 그를 돌아보았다. “그 일이 만약 사실이라면 말이오. 정말 젊음의 세월을 맞바꿀 만한 가치가 있는 기억이었소?” 늙은이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 기억은 가치가 아니라 죄의식입니다.” --- p.1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