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이 개인에게 갇히게 되면, 사회 구조에 대한 관심을 잃게 된다. 모든 판단 기준이 자신의 행복과 불행, 이 둘 중 하나로 좁혀지기 때문이다. 행복한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고, 불행한 것은 하나님의 징계가 된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에게 유익한가’가 만사의 판단 기준이 된다.” ---p.35, 「가난한 동네로 간 예수」
“예수는 껍질을 버리라고 했다. 그 껍질은 바로 부富, 그러니까 재산이었다. 예수는 부에 대해서 매우 단호했다. 일단 부를 사랑하는 순간, 하나님을 잊는다고 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라는 〈마태복음〉 6장 24절은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물론 구약에서는 부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고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나타내는 징표였다. 역경을 이긴 이들에게 돌아오는 것이 자녀와 재산의 축복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신약에서는 부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는 요인이라고 심심치 않게 정의한다.” ---p.127,「존경받는 부자는 있는가」
“한국 교회는 예수를 믿으면 덕 볼 수 있다는 주장과 함께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인간의 죄성 탓으로 돌린다. 사회 구조적 문제가 모두 인간의 죄성 탓이라는 단언은 너무나 위험하다. 노동자들이 절망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현실을 두고, 자기 목숨을 함부로 여기는 인간의 죄 탓으로 돌리거나 몇몇 못된 기업주의의 죄 탓으로 돌리는 게 온당한가. 사회 구조적 모순에 눈 감는 기독교인은 ‘맛 잃은 소금’이라 단언할 수 있다. 예수는 정의를 위해 싸웠고, 그 대가의 냉혹함에 결코 기죽지 않았다. 냉소주의의 틀로 숨어들지 않았다. 예상했던 대로 세상은 총체적으로 퇴보하고 있다. 침묵하고 타협해야 하는가. 행동을 하려면 값을 치러야 한다. 치러야 하기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따라야 신앙이다.” ---pp.167-168,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기독교는 과연 전쟁을 막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을까. 평화의 조정자로서 기독교가 얼마나 그 존재감을 나타냈을까. 부끄럽게도 기독교인은 전쟁을 막기는커녕 도리어 유발시킨 장본인들이었다. 2001년 9·11테러가 기억난다. 테러를 당한 조지 부시 행정부는 이튿날 국무 회의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끊이지 않는 담배 연기 속에 분노와 자조, 질책의 목소리들로 뒤범벅이 됐을 것 같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 울려 퍼졌다. 부시 대통령을 비롯한 각료들이 함께 이 노래를 불렀다. 분위기만 보면 찬양 집회 그 자체였을 것 같다. (공지의 사실이나 부시는 재임 시절 아침마다 종교가 같은 장관들과 함께 성경 공부를 하는 독실한 신자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략하는 전쟁을 논의했다. 그 전쟁으로 사망한 사람만 최소 22만 5천 명이라고 한다. 이 정도면 강릉시 인구와 비슷하다.” ---p.183, 「필요하면 평화를 사라」
“성서든, 성서를 ‘거짓’이라 하는 이들의 주장이든 그 내용을 과학적으로 검증하는 작업이 절실하다. 신약 성서학자인 김창선 박사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관심이 사라질 때, 기독교는 왜곡되어 정치의 시녀로 변질될 위험이 커지게 된다”라고 우려하면서 든 예가 기막히다. 나치 시대인 1930년대 당시 독일 교회는 예수가 유대인이 아니었고 북방 인종에 속하는 아리아족 출신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덮어놓고 맹신하는 믿음은, 기득권들로 하여금 그네들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는 데 이용되기 좋다는 설명이다. 목사에 대한 신화화 그리고 절대 순종은 우매한 신앙에서 잉태된다. 신앙에 있어 불필요한 듯 보여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지성이다.” ---pp.201-202,「예수는 과연 부활했는가」
“나는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 정의가 승리하는 게 아니라 승리하는 게 정의인 시대, 예수의 부활이 없다면 잃어버린 자들에게는 희망이 없다. 다시 말해 촌에서 자란 블루칼라 청년이 로마 제국과 그 끄나풀의 절대 권력 앞에 굴하지 않고, 무기와 재력 또 세력이 아닌 평화의 이름으로 싸워 이기는 이 위대한 반전극이 허구요, 가식이라면 이것만큼 절망적인 게 없다. 신앙에 앞서 의지적으로라도 의지하고 싶은 게 바로 부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