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지역에는 분쟁뿐 아니라 오래된 문명도 있다. 문명사적 관점에서 중동의 역사가 1시간이라면 55분은 문명의 시기였고 5분만이 분쟁의 시간이었다. 중동의 문명과 문화는 깊고 넓으나, 그곳의 분쟁과 갈등은 짧고 얕다. 중동 지역에는 인류 최초·최고의 문명인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이 꽃을 피웠고, 서구의 본류인 그리스 문명과 로마 제국이 머물렀으며, 찬란한 페르시아와 오스만 문명도 걸쳐 있다. ‘이성’의 헬레니즘과 쌍벽을 이루는 ‘신앙’의 헤브라이즘(히브리 문명)과 이슬람 문명도 빼놓을 수 없다. 이처럼 중동 지역은 문명의 발상지이자 동서 문명의 교차로였다. 바다와 육지의 ‘길’은 인류 문명이 소통하는 대동맥이었다.
그러나 건설자가 있으면 언제나 파괴자가 있게 마련이던가. 이스라엘과 아랍국들 간의 갈등과 분쟁, 미국의 이라크 침공, 숱한 내전과 전쟁은 중동의 비극이자 현실이다. 분쟁의 연원(淵源)이 무엇이든 간에 중동 지역에는 뿌리는 같으나 서로 다른 역사의 길을 걷는 동안 합일될 수 없는 평행선을 달리는 두 민족, 두 종교가 하나의 땅을 두고 겹쳐 있다. 세계의 화약고라 불리는 중동, 그중 뇌관이라 할 수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바로 그 지점이다.
한쪽의 건국일이 다른 한쪽에서는 ‘나크바(재앙)’의 날이 되고, 한쪽이 오랜 세월 타지를 헤매다가 고토(古土)로 돌아온 ‘귀향’에 의해 다른 한쪽은 터전을 이루고 살던 고향에서 쫓겨난 ‘난민’이 되고, 한쪽은 다른 한쪽을 ‘테러리스트’라 하고, 다른 한쪽은 이를 ‘독립투쟁’으로 믿는다. 똑같은 높이의 담장을 두고 한쪽은 ‘보안장벽’이라 일컫고, 다른 쪽은 ‘분리장벽’이라 부른다. 이는 단순히 ‘관점과 입장의 차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숙명(宿命)의 차이’라 부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쪽의 지배가 다른 쪽은 종속이 되는 곳, 애당초 거기에서는 공존이란 가능하지 않은 것이었을지 모를 일이다.
아직도 무지로 인한 오해와 미숙함으로 인한 편견과 국익 우선주의로 인한 이해관계의 틀 속에서 이 지역에 대하여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실정이고 보면, ‘우리’가 이 지역을 어떻게 대하고 상대해야 할지를 행간 속에 담으려 최대한 노력했다. 내가 행간 속에 담아내려 했던 것이란 바로 서로의 차이를 차분히 찾고, 올바로 인식하고, 정중하게 인정하는 것―그것이 이 책의 출발점이다. 무엇이 서로 다른가 하는 것을 냉정하게 살펴본 연후에야 비로소 상대를 제대로 보게 되고, 올바로 볼 수 있어야만 상대를 인정하게 될 테니까. 두 민족이 한 집에서 같이 혹은 최소한 이웃으로 따로 살아가려면 동시대를 살아가는 상대 녀석들(fellow citizens)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조상의 땅에서 온전히 나 홀로 살기를 원해왔지만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어떤 경우에도 아랍-팔레스타인은 존재했듯이 역시 유대인들은 지구상에서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과거 유대인들이 그러했듯이 이 땅에 사는 아랍-팔레스타인인들에게도 꿈이 있고 욕구가 있다고, 요르단강과 지중해 사이 거기에는 더 이상 다수의 유대인만이 아니라 숨 쉴 권리가 있는 또 다른 소수의 아랍-팔레스타인인들도 있다고, 테러리즘에 의한 단번의 기적적인 해결책은 결코 없다고, 계속해서 싸우되 도덕성이 결여된 방법으로는 안 되는 법이라고, 과거 나치하의 유대인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팔레스타인을 지금 당장 돌보지 않는다면 거기서 살아남은 자들이 건설한 이스라엘은 중동의 유일한 민주국가임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의 동등한 권리 없이는 시온주의도, 민주주의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이를 알지 못하면 결국 모두가 피해자일 뿐이라고, 마지막으로 평화롭게 살기 원한다면 반드시 일정한 ‘선한’ 희생과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공짜는 없을 거라고―이것이 이 책이 요구하는 숨은 길이다.
---「서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