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인지언어학의 특성
1. 들머리
이 장은 언어 연구, 특히 의미 연구의 새로운 방법론인 ‘인지언어학(Cognitive Linguistics)’의 특성을 기술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인지언어학은 언어와 의미에 대해 종래의 생성언어학으로 대표되는 객관주의 언어관과 대비하여 커다란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기존 언어학의 방향과 방법론에 비추어 볼 때 인지언어학의 출현은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질적 차이를 함의한다는 점에서 ‘틀의 전환(paradigm shift)’으로 간주된다. 인지언어학은 객관주의 언어관과 다음 세 가지 측면에서 구별된다.
첫째, 언어 분석에서 사용 주체인 인간의 배제 또는 포함에 대한 시각 차이이다. 객관주의 언어관은 과학의 이름 아래 방법론상으로 검증 가능한 객관성과 엄밀성, 그리고 연구 대상의 분업화를 중시하며, 언어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를 단순히 반영하는 것이므로, 언어 연구에서 인간을 배제한 채 언어 자체의 자율적 구조 기술을 추구해 왔다. 그 반면에, 인지언어학에서는 언어를 인간 마음의 반영이라고 보며, 인간의 마음 또는 마음과 연관된 언어는 인간, 특히 인간의 신체적 경험 및 문화적 배경과 분리하여 연구할 수 없다고 본다.
둘째, 언어능력 및 언어 연구의 시각 차이이다. 객관주의 언어관은 인간의 여러 능력 가운데 하나인 언어능력을 다른 인지능력과 무관한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구성 원리의 인지 체계로 간주하며, 통사론을 비롯한 언어학의 하위 분야들 간에는 각각 매우 다른 종류의 구조화 원리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에 비해 인지언어학에서는 언어의 이해와 사용을 일반적 인지능력의 일환으로 간주한다. 이와 관련하여 Janda(2010: 8)에서는 인지언어학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간의 인지가 언어 현상과 동기화되어 있는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인지언어학은 의미론을 비롯한 언어 연구의 다양한 분야 전반에 걸쳐 적용되는 공통적 구조화 원리가 존재한다고 본다.
셋째, 단어의 의미에 대한 언어적 지식과 백과사전적 지식의 시각 차이이다. 객관주의 언어관은 순수한 ‘언어적 지식(linguistic knowledge)’과 화자의 ‘백과사전적 지식(encyclopedic knowledge)’을 엄격히 분리하고, 의미 분석의 대상을 ‘언어적 지식’에 국한하였다. 그 반면 인지언어학에서는 의미를 언어적 지식과 세상사의 지식, 즉 백과사전적 지식 속에 들어 있는 인지구조로 간주하고 그 둘의 뚜렷한 구분을 부정하며, 단어의 의미를 본질상 백과사전적 지식으로 본다.
요컨대, 인지언어학은 ‘언어’와 ‘의미’에 대해 인간의 배제에서 인간 중심의 관점으로 틀의 전환을 가져왔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곧 언어는 사람의 인지적 산물일 뿐 아니라 인지적 도구이므로 그 구조와 기능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사람의 일반적인 인지능력을 반영하고 있으며, ‘의미’는 언어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므로 언어 연구의 일차적인 대상으로 삼게 되었다. 따라서 언어 연구의 중심축이 통사론에서 의미론으로 옮겨졌을 뿐만 아니라, 의미 작용에 관한 언어 연구에 사람의 신체적 경험과 사회?문화적 배경이 중요한 기반이 된다는 이해에 도달하였다.
아래에서는 언어, 특히 의미 분석의 주요 연구 방법론으로서 인지언어학의 성격, 위상, 주요 방법론, 의의와 전망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2. 인지언어학의 성격
인지언어학은 1970년대 중반 이후 생성주의자의 인지능력 및 과정과 분리된 문법관의 반작용으로 출현하였다. 자의식적인 지적 운동으로 출발한 인지언어학은 40여 년간 수많은 지류가 모여 큰 물줄기를 형성하면서 언어 연구의 가장 중요하고도 지배적인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 최근의 문헌을 통해 인지언어학의 정의와 기본 가정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인지언어학의 정의에 대한 네 가지 견해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a. 인간 마음의 본질, 더 나아가서 인간의 본질을 규명하기 위한 학제적 연구의 일환으로서 ‘언어, 몸과 마음, 문화’의 상관성을 밝히려는 언어 이론 (임지룡 2006d: 4)
b. 언어, 마음, 인간의 사회 문화적 경험 간의 관계를 탐구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언어적 사고와 관행을 연구하는 현대 학파로서, 인지과학의 학제 간 기획에서 점차 큰 영향력을 발휘하며 급속도로 발전하는 학문 분야 (Evans 2009: 50)
c. 우리의 언어적 능력은 우리의 일반적 인지능력에 강하게 뿌리박고 있으며, 의미는 본질적으로 개념화이며, 문법은 용법에 의해서 형성된다는 가정에 기초를 둔 언어 연구의 접근법 (D?browska & Divjak 2015: 1)
d. 언어를 ‘비-구성 단위적(non-modular)’, 상징적, 용법 기반적, 유의미적, 창조적인 것으로서 특징짓는 언어 연구의 일반적 접근법 (Hamawand 2016: 61)
(1a, b)에서는 인지언어학을 ‘인지과학’의 학제적 성격과 언어?사람?사회-문화적 경험의 상관성에 주목하고 있다. (1c)에서는 언어능력과 인지능력의 상관성을 언급하며, 의미가 개념을 파악해 가는 과정의 ‘개념화’이며, 문법이 용법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을 명시하였다. 또한 (1d)에서는 인지언어학의 기본적 가정 다섯 가지를 언급한 것이다.
다음으로, 인지언어학의 주요 기본적 가정에 대한 다섯 가지 견해를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Croft & Cruse(2004: 1)에서는 ‘인지언어학’에 대한 세 가지 ‘주요 가설(major hypothesis)’을 (2)와 같이 제시하고 있다.
(2) a. 언어는 자율적 인지능력이 아니다.
b. 문법은 개념화이다.
c. 언어 지식은 언어 사용으로부터 나온다.
둘째, Geeraerts & Cuyckens(2007: 5)에서는 인지언어학의 세 가지 ‘기본적 특징(fundamental characteristics)’을 (3)과 같이 들고 있다.
(3) a. 언어 분석에서 의미론의 우선성
b. 언어 의미의 백과사전적 본성
c. 언어 의미의 원근법적 본성
셋째, Evans(2011: 73)에서는 인지언어학의 다섯 가지 ‘정립(thesis)’을 (4)와 같이 들고 있다.
(4) a. 신체화된 인지 정립
b. 백과사전적 의미론 정립
c. 상징적 정립
d. 의미는 개념화라는 정립
e. 용법 기반 정립
넷째, 임지룡(2012: 377)에서는 인지언어학의 다섯 가지 ‘특징’을 (5)와 같이 제시한 바 있다.
(5) a. 언어의 원리·현상·지식은 세상사의 원리·현상·지식과 상통한다.
b. 사고 및 인지는 구체적(또는 신체적)인 데서 추상적(또는 심리적)인 데로 확장된다.
c. 범주 구성원(즉 원형과 주변 요소)은 비대칭적이다.
d. 형식(또는 형태·구조)과 내용(또는 기능·의미)은 자의적인 것만이 아니라 도상적, 동기화되어 있다.
e. 의미는 해석이다.
다섯째, Hamawand(2016: 62-72)에서는 인지언어학의 다섯 가지 ‘기본적 가정(fundamental assumption)’을 (6)과 같이 들고 있다.
(6) a. 언어는 자율적 구성단위가 아니다. 즉, 언어를 위해 특수화된 뇌의 자율적 부분은 없다.
b. 언어는 상징적이다. 즉, 언어의 형태와 의미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c. 언어는 사용에 근거한다. 즉, 언어 지식은 언어의 실제 예에서 파생된다.
d. 언어는 유의미적이다. 즉, 모든 언어 표현은 의미 값을 부여받고, 언어에서 중요한 역할을 부여 받는다.
e. 언어는 창조적이다. 즉, 언어는 화자가 관습적인 표현에서 새로운 언어 표현을 생산하며 동일한 상황을 다른 방식들로 기술하도록 허용한다.
(2)-(6)에서 인지언어학의 기본 가정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볼 수 있다. (1)의 정의를 포함하여 (2)-(6)에서 본 기본 가정의 다양성과 관련하여 다음 사항을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즉 인지언어학은 기존의 구조언어학이나 생성언어학과 같이 그 창시자에 의해 명시된 경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는 일반적 인지능력의 일환이라는 생각에 기반을 둔 채 끊임없이 검증되고 확산되어 가는 ‘열린 언어학’이라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인지언어학은 언어에 대한 다음의 세 가지 공통된 생각에 기반을 두고 있다(ICLA 홈페이지 참조). 첫째, 언어는 문화적, 심리적, 의사소통적, 기능적 고려의 상호작용을 반영하는 인지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둘째, 언어는 개념화와 인지적 과정이라는 현실적 관점의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셋째, 언어에 대한 어떤 이론적 개념이라도 신경 조직과 기능에 관해 알려진 것과 공존해야 한다.
3. 인지언어학의 위상
여기에서는 ‘인지’라는 용어의 뜻넓이를 비롯하여, 좌표, 핵심 분야를 중심으로 그 위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3.1. ‘인지’의 뜻넓이
‘인지언어학’은 글자 그대로 언어를 인간의 ‘인지’와 관련하여 파악하려는 언어학적 접근법이다. ‘인지’의 뜻넓이에 대한 세 가지 견해를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인지(cognition)’는 ‘인지심리학(cognitive psychology)’에서 유래된 용어로서, ‘고등’ 정신적 과정을 가리키는 일반적 용어이다. 인지는 일반적으로 사고와 개념화, 기억?표상?정신적 영상, 지각과 주의, 추론과 의사 결정과 같은 정신적 활동을 포함한다(Stratton & Hayes 1993: 36 참조). Arnheim에 따르면 우리의 머릿속에 정보가 저장되고 사용되는 과정은 감각의 단계, 지각의 단계, 인지의 단계가 있다(김정오 역 1982: 439-40 참조). 예를 들어, 어린이들이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이나 어른이 되어 낯선 외국어를 직면하게 될 경우 ‘감각(sensation)’의 단계에는 음성의 연속체가 귀에 들리기는 하지만 단어로 분절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 뜻을 이해하지도 못한다. ‘지각(perception)’의 단계에는 감각의 단계보다 한층 더 이해의 단계에 접근한 경우로서 단어의 덩어리가 분절되며 부분적으로 그 뜻이 파악된다. 그에 비하여 ‘인지(cognition)’의 단계에서는 발화나 이야기 덩어리가 형식적인 측면의 음운, 형태, 통사뿐만 아니라 의미적인 측면의 뜻 파악이 이루어진다. 외부 자극에 대하여 감각의 단계는 수동적이며, 인지의 단계는 능동적이며, 지각의 단계는 그 중간에 해당한다(임지룡 1997a: 12-13 참조). 요컨대, ‘인지’는 의미와 관련하여 정보를 수용하고 생산하는 마음의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작용이라 할 수 있다.
둘째, Gibbs(1996: 27-29)에서는 ‘인지언어학’에서 ‘인지적(cognitive)’이라는 용어를 다음 두 가지로 규정한 바 있다. 첫째, 인지언어학은 철학, 심리학, 인류학 등 다른 학문 분야로부터의 마음과 그 작용에 관한 경험적 발견 사실을 언어 이론에 통합하려는 점에서 인지적이다. 둘째, 인지언어학은 인간의 개념적 지식의 구조뿐만 아니라 그 구체적인 내용의 탐구를 동시에 추구하려 하는 점에서 인지적이다. 이 경우 언어의 구조가 인간의 개념적 지식, 신체적 경험, 담화의 의사소통 기능과 관련되어 있으며 그러한 요인들에 의하여 동기화되어 있다고 본다. 요컨대, 인지언어학에서 ‘인지적(cognitive)’은 언어가 인지의 필수적인 국면으로 간주됨을 의미한다. 언어 지식은 경험에 근거하고 있으며, 마음은 초기에 백지상태이고 인지 발달은 학습의 문제로 간주된다(Hamawand 2016: 189 참조).
셋째, 野村益寬(2014: 175-179)에서는 눈앞의 것이 의미로 나타날 때 언어가 수반되는데, 이 경우 의미로 나타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마음의 작용을 ‘인지’로 규정하였다. 따라서 언어는 인지 기제의 중요한 몫을 담당하고 있다고 본다. 이 견해는 인간 진화의 역사 가운데 언어가 비교적 최근에 인간의 고유한 인지능력을 기반으로 해서 출현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한 인지능력에는 범주화, 해석, 유추, 참조점 관계, 전경과 배경 등이 있다. 요컨대, 언어는 인지 기제의 하나이며, 언어에는 인지능력이 반영되어 있는데, 그 중심에 의미가 놓여 있다고 하겠다.
3.2. 인지언어학의 좌표
넓게 보면 인지언어학은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에 속한다. 인지과학은 철학, 심리학, 언어학, 인류학, 컴퓨터과학, 신경과학 등의 여러 학문 분야로부터 인간의 ‘마음(mind)’과 ‘마음의 작용’을 탐구하기 위한 ‘학제적 연구(interdisciplinary research)’로서, 인간의 행동 및 그 산물 자체는 마음의 산물이라는 관점을 취하고 있다. 이 경우 언어가 인지의 주된 도구이며 언어 과정이 인지 과정의 핵심이기 때문에 언어의 인지적 연구, 즉 인지언어학은 마음의 본질을 밝히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인지언어학’에서는 언어의 이해와 사용이 지각, 개념 체계, 신체적 경험, 세상사의 경험, 지식, 문화적 배경 등의 일반적 인지능력과 깊은 상관성을 전제하고 있다. 이 연장선상에서 인지언어학은 “언어 지식은 일반적 인지의 일환이다.”라는 언명을 표방하고 있다. ‘인지언어학’의 원리가 언어학의 여러 하위 분야에 걸쳐 적용되는 과정에서, 연구의 초점 분야에 따라 (그림 1)에서 보듯이 ‘인지의미론’, ‘인지문법론’, ‘인지화용론’, ‘인지음운론’, ‘인지유형론’, ‘인지언어습득론’, ‘인지시학’ 등으로 그 지평이 세분화될 뿐 아니라 정밀해지고 있다. 또한 ‘인지문법론’은 ‘인지형태론’과 ‘인지통사론’으로 다시 나뉘기도 한다.
그림 1 ‘인지언어학’의 하위 분야
3.3. 인지언어학의 핵심 분야
‘인지언어학’은 그 이론의 성립과 체계화 과정에서 의미와 문법이 중심 연구 대상이 됨으로써 Lakoff(1987)에 의한 ‘인지의미론(Cognitive Semantics)’과 Langacker(1987)에 의한 ‘인지문법(Cognitive Grammar)’이 중요한 두 개의 축이 되었다. 이들의 관계 및 개요는 (그림 2)와 같다(Evans 2009: 5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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