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와 구성원 간에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당연히 원인이 있다. 그리고 그 결과도 있다. 이때 그 원인과 결과는 상당히 닮아 있다.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원인은 리더가 자질상 의사소통을 위한 지적 능력·기술을 비롯한 조직경영 능력에 문제가 있거나, 그 리더를 직접 보좌하고 있는 무리들(예를 들어 환관)이 리더와 구성원들 사이에 견고한 불통의 장막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리더의 자질과 최측근의 리더에 대한 접근 차단이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게 하는 주요 원인이다. 이로 인해 리더와 구성원 간에 올바른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면 리더의 의사결정 능력은 현저히 퇴화되고, 최측근의 월권적 활동은 장마 때의 곰팡이처럼 왕성해진다.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기면 현장감각을 갖출 수가 없어 제대로 된 의사결정을 할 수 없고, 자연스레 리더의 생각이나 판단이 최측근의 의견에 좌우될 수밖에 없게 된다.
문제는 일반 조직이든 국가 조직이든 리더의 최측근(과거의 환관, 지금은 리더의 신상과 일상을 챙기는 수행비서 등)이라는 사람들이 모두 선출된 권력이거나 공식적으로 검증된, 즉 공식적으로 책임이 부여된 적도 부여할 수도 없는 이들이라는 것이다. 리더의 최측근이라는 사람들의 역할은 리더의 업무적 의사결정을 돕는 것이 아니라, 주로 리더의 일상사를 챙기는 것이다. 따라서 리더가 의사결정에 있어 이런 최측근의 의견에 영향을 받게 되면, 그것은 바로 최측근이 ‘공식적인 책임이나 능력’ 없이 ‘비공식적인 권한과 영향력’만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550년의 지난한 성업에 의해 들어선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 진(秦) 왕조를 14년의 역사로 허무하게 끝나게 한 환관 조고(趙高)나, 420년 역사의 한(漢) 왕조의 멸망을 재촉한 십상시(十常侍)와 같은 존재가 바로 그런 최측근들이다. 리더의 의사소통의 부재가 리더의 조직경영 능력 약화와 최측근의 발호, 나아가 국가 멸망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1장 리더의 본질_ 리더란 무엇인가」중에서
《성경》에서는 ‘사람을 쉽게 믿는 것은 경박스러움의 표시’라고 말한다. 상대방이 친근함을 나타내고 듣기 좋은 소리를 할 때, 그런 행위로 벌어지는 일에 대한 책임이 상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나 자신에게 있다는 뜻이다. 생각을 깊이 하지 않기 때문에, 즉 경박하기 때문에 그런 말과 행동을 그대로 믿는다는 것이다. 공자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다.
‘군자는 사람이 말을 잘 한다고 해서 그를 등용치 않고, 사람이 바르지 않다고 해서 그 사람의 말을 모두 버리지 않는다.’
다름 아닌 다음과 같은 《맹자》에서의 ‘지언(知言)’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지적이다.
‘마음을 다해 사람의 본성을 파악하고, 이 세상 모든 말들에 대해 그 이치를 따져보고 지극히 함으로써 시비득실의 까닭을 알지 못함이 없게 한다.’
《성경》이 상대의 가벼운 행동과 교언영색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의 경박을 탓하고 있다면, 공자는 받아주는 이의 합리적·이성적 판단과 함께 공리주의(功利主義)적 행동까지도 강조하고 있다. 상대방이 하는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도 말고, 또 그 사람의 지금까지의 행실에 대한 선입견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2장 인간관계_ 쉽게 다가오는 사람은 그 떠남도 쉽다」중에서
쾌락 추구는 기본적으로 ‘이기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양주는 쾌락의 의미와 방법론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 그 바탕이 되는 이기주의를 날카롭게 정의했다. 이것이 바로 다음 말로 대변되는 그의 ‘위아설(爲我說)’ 또는 ‘귀기론(貴己論)’이다.
‘(자신의) 털 하나를 뽑으면 온 천하가 이롭게 된다고 해도 그렇게 하지 않겠다.’
인간의 이기주의에 근거하여 자신의 모든 주장을 전개한 A. 스미스와, 공리주의자로 평가받는 경험론 철학자 D. 흄이 각각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것은, 이기주의에 대한 양주의 날카로운 정의가 결코 지나친 억측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 아담 스미스 : 1억이나 되는 이웃 형제들의 파멸이 있더라도, 만약 그가 직접 그것을 보지 않는다면, 그는 깊은 안도감을 가지고 코를 골며 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이 거대한 대중의 파멸은 분명히 그 자신의 하찮은 비운보다 관심을 끌지 못하는 대상인 것으로 보인다.
- 데이비드 흄 : 내 손가락에 상처를 내기보다는 차라리 세상이 전부 파멸되기를 바라는 것은 이성에 반하는 것은 아니다.
에피쿠로스는 고통을 줄이기 위해 아예 물질적, 육체적 쾌락은 피하고 정신적 쾌락에 치중하라고 말했다. 반면에 양주는 물질적, 육체적 쾌락의 생애 총량이 최대가 될 수 있도록 고통과 쾌락을 현명하게 안배하라고 강조했다. 한쪽은 물질과 육체를 아예 배제하고, 다른 한쪽은 여전히 물질과 육체에 머무르고 있다는 차이가 있지만, 양쪽 모두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쾌락을 추구한 이성 행복론이었다.
---「6장 행복_ 지금 우리에게는 아타락시아가 필요하다」중에서
‘근사(近思)’는 다름 아닌 ‘실용성’을 의미한다. 자하도 《논어》에서 그런 의미로 말했고, 주희와 여조겸도 그들이 공저한 책을 《근사록》으로 이름 지은 이유가 ‘공허함’을 부정하고 ‘실리’를 강조하기 위한 의도라고 밝히고 있다. 《논어》와 《맹자》의 궁극적인 공부방식 또는 공부목적이 경전의 자구 하나하나의 뜻풀이에만 지나치게 집착하는 훈고학일 수는 없다. 더욱이 오늘날 인간평등시대에 공자의 이름을 피휘(避諱, 성인 등을 높이 받들어 그 이름자를 발음하지 않는 등 사용하지 않는 것)하는 것과 같은, 공자를 신처럼 숭배하기 위한 것일 수는 없다.
‘나는 나면서부터 잘 아는 자가 아니다. 옛것을 좋아해 부지런히 그것을 구한 자이다.’
공자 스스로 이렇게 말한 것처럼, 공자는 사람 위의 사람이 아니다. 즉, 신이 아니다. 그런데도 절대자인 신처럼 공자를 떠받든다면 그것은 공자의 인간적 노력인 ‘敏而求之者(민이구지자, 부지런히 그것을 구한 자)’를 오히려 평가에서 제외하는 행위가 되고 만다. 결함 있는 보통의 한 인간이 평생 동안 각고의 노력을 통해 신에 버금갈 정도로 자신을 향상시킨 그 위대한 노력을 아예 외면하는 꼴이 된다는 것이다. 공자나 맹자가 사람들의 존중과 존경을 받는다면 그 전제는 그들이 신이 아닌 ‘인간’이고, 그 존중과 존경의 대상은 그런 훌륭한 인격과 소양을 갖추기까지 기울인, 보통사람을 뛰어넘는 인간으로서의 ‘각고의 노력’이어야 한다. 그것이 신이 아닌 인간인 공자와 맹자에 대한 정당한 대우이고 이성적 존중이다.
---「13장 실용_ 시대를 대표하는 학문은 모두 실용을 지향한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