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평화롭고 다소곳해서 모든 것이 인고요, 침묵이요, 복종이요, 묵상으로 보이는 이 식물의 세계는, 그러나 사실은 숙명에 대한 저항이 가장 격렬하고 집요하게 펼쳐지는 곳입니다. --- p.19
지금 당신을 괴롭히는 거대한 법칙들 가운데 무엇이 어깨를 가장 무겁게 짓누르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는지요? 식물에게 그것은 너무나도 쉬운 질문일 것입니다. 두말할 나위 없이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한자리에만 붙박여 있게 만든, 바로 그 대자연의 법칙일 테니까요. 아울러 노력을 이리저리 낭비하는 우리 인간보다 식물은 무엇에 먼저 저항해야 하는지 훨씬 더 잘 알고 있습니다.
뒤엉킨 뿌리의 어둠으로부터 거슬러 올라 스스로를 형성하고 꽃의 광채로 활짝 피어나는 일편단심의 에너지는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장관을 연출합니다. 오로지 하나의 의지로, 아래로 끌어내리는 숙명에서 벗어나 위로 솟아오르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지요. --- p.20
무겁고 어두운 법칙을 어기고 우회하여 자신을 해방하고 비좁은 공간을 깨뜨려, 스스로 만들든 어디서 구하든 날개를 달고 가능한 한 멀리 도망쳐, 숙명으로 갇힌 공간을 극복하고 또 다른 영역으로 다가가 살아 움직이는 세계로 파고드는 것……. 식물로서 그런 경지에 도달한다는 건, 우리 인간이 운명적으로 부여된 시간을 벗어나 살고 물질의 가장 버거운 법칙에서 해방된 우주로 진입하는 것만큼이나 놀라운 일이 아닐까요? --- p.20
이제 우리는 꽃이 인간에게 불굴의 용기와 굳은 심지, 기발한 재치의 경이로운 모범이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볼 것입니다. 누구든 정원에 핀 작은 꽃 한 송이가 발휘하는 에너지의 절반만이라도 자신을 괴롭히는 온갖 역경을 극복하는 데 투여한다면, 지금과는 아주 다른 운명을 맞이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도 좋습니다. --- p.21
하지만 자연 만물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무엇이든 인간 스스로 창조해냈다는 말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주장인지가 빤히 드러나지요. 이 지상에 마지막으로 등장한 우리 인간은 이미 존재해온 것을 다시 찾아낼 뿐이며, 우리 이전에 생명이 걸어간 길을 그저 ‘놀란 어린아이’처럼 뒤밟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 p.43
생명의 뿌리이기도 한 자신의 꽃자루는 암꽃의 꽃자루만큼 길지 못한 것이지요. 이대로라면 암술과 수술의 결합을 가능케 할 유일한 공간인 빛의 수면 위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연이 벌인 일 중에서 이보다 더 잔인한 상황이라든지 부주의한 과실이 또 있을까요? 눈앞에 빤히 보이는데도 가닿지 못하는 이 숙명,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은데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이 갈망의 드라마가 어떠할지 상상해보십시오! 그건 어쩌면 지상에서 우리 인간이 겪는 비극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 p.47
인간 세상과 마찬가지로 꽃들의 세계에서 역시 새로운 발견이란 똑같은 법칙, 똑같은 좌절, 똑같은 성공의 지난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집니다. 마치 우리의 인내와 끈기, 자존심을 꽃 또한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다채로운 지성을 소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거의 동일한 수준의 희망과 이상을 좇아 매진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처럼, 결국은 자신들을 돕고야 말 어떤 거대하면서도 무심한 섭리에 맞서 투쟁하는 것 같습니다. --- p.88~89
꽃을 통해 자연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이라든가 상태, 유혹의 방법과 미학적 취향 등은 우리 인간의 그것들과 무척 유사하다는 깨달음 말입니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는, 우리 인간 쪽에서 자연의 그런 요소들에 부응해왔다고 말하는 편이 낫겠군요.
사실 인간이 스스로 고유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냈다는 것만큼 부실한 주장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건축학적, 음악적 모티프들, 색과 빛에 관한 그 모든 조화 의식이란 바다, 산, 하늘, 밤, 황혼 등과 같은 대자연의 품에서 직접 빌려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를 들어 우리 내면에 나무의 아름다움과 무관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요? --- p.103~104
나는 지금 땅의 권능이 됐든, 우리 본능의 중요한 근원이 됐든, 우주에 대한 감각이 됐든, 숲속 명상거리로서의 나무 이야기를 넘어 나무 그 자체, 숱한 세월을 푸름으로 지탱해온 한 그루의 고독한 나무까지 더불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존재 안에 평정과 행복의 심연을, 그 투명한 동공을 구성해온 무의식적인 이미지들 중에서 아름다운 나무의 기억에 빚지지 않은 것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 p.104
그보다는 자연을 움직이는 힘이, 적어도 지적인 차원에서만큼은, 우리 인간의 힘과 밀접하게 맞물려 돌아간다고 믿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우리의 정신은 자연과 더불어 같은 우물을 시용하고 있습니다. 자연과 인간은 같은 세계에 속해 있으며, 서로 거의 닮은꼴입니다. 우리는 범접할 수 없는 신들과 어울려 살아야 하는 처지가 결코 아닙니다. 우호적이되 아직은 적잖은 부분 베일에 가려져 있는 자연의 뜻과 더불어 공존해나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것을 밝혀내고 이롭도록 유도하는 일에 인간의 지혜를 모아야 하는 것입니다. --- p.117
꽃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만물을 살아 숨 쉬게 만드는 기운이 우리 인간을 살아가게 해주는 그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걸 좀더 확신할 수 있게 해줍니다.
꽃과 우리가 서로 닮았고, 꽃이 가지고 있는 것을 우리 역시 가지고 있으며, 꽃의 방법과 습성과 관심과 성향과 욕망이 우리의 그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때, 우리가 억누를 수 없는 본능으로 희구하는 모든 것은 저절로 그 당위성을 확보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삶의 곳곳에 꽃의 지혜가 만개할진대, 어떻게 그 삶이 악과 죽음, 어둠과 허무에 대한 승리의 몸짓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 p.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