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기억을 이기지 못한’이라고 부제를 붙였을까?”
“기억을 이기지 못한다는 건, 결국 기억하고 싶은 욕망이고
동시에 시간 위로 모든 게 희미해져 가는 서글픈 섭리를 말하고 싶었던 것 같아.”
어쩌면 떠나고, 떠나보내며, 글 쓰고, 소진하는 화면 속 샤오홍이 내게 전해 준 답이었다. ---「프롤로그」중에서
그들도 살아있기에 영화를 찍고
나도 살아있기에 영화를 본다.
그렇다면 이런 기록을 하나씩 남길 때마다
우리는 삶에 더욱 가까이 가는 것인가.
아니면 삶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는 것인가. ---「청춘/청춘, 상처, 사람, 삶」중에서
결코 인간의 본질을 걸고 대항할 수 없는 ‘존재’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시간의 축에
욕망을 걸게 되리라는 사실을! ---「시간/시간에 걸린 욕망」중에서
세상의 고독과 인생의 허망 앞에서도 기개를 잃지 않고,
여백을 새긴 선비의 사무친 문인화와 풍자적으로 병치된
21세기 한 남자의 뒷모습이 오래도록 남는다.
그 남자의 겨울은 결코 따스하지 않았으리라.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그 남자의 세한도」중에서
어차피 소설과 영화 등 인간의 창조물은
우주의 창조를 본떠서 ‘사랑’이라는 축을 가운데 두고
벌어지는 혼란과 갈등, 통합의 순환 구조를 보인다.
단, 이때 그들은 역시 창조주를 모방하여 이전의 사랑과 티끌만큼이라도
‘달라진’ 사랑, 즉 ‘보기에 좋은’ 형상을 만드는 작업을 원한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꽤 괜찮은 에로스」중에서
그 현실에 단 하나, 빛이 있다면 새끼 고양이를 쓰다듬어 주듯
이 그 껍질을 사랑스럽게 보듬어 주는 손길이다.
누구라도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누군가의 따뜻한 손을 잡아 주거나 어깨를 빌려주고 싶다. ---「고양이를 부탁해/따뜻한 손길로」중에서
이 영화들에서 상처와 갈등 해결은 구세주나 절대자 신의 힘이 아니다.
그들은 바로 그 관계 속에서 힘들지만, 아프지만, 그럼에도 결국 서로를 받아들인다.
우리 인간은 모두 부족하고 잘못할 수 있는 완벽하지 못한 존재가 아닌가.
서로 보듬어 살아가는 것.
실은 이 점이 신이 우리에게 주신 이중적인 축복 혹은 굴레일 것이다. ---「가족의 탄생/내가 서 있는 곳」중에서
여자 셋이서 저마다 기억 하나씩을 집어 올린 그 순간,
그리움은 이렇게도 오는 걸, 내 나이가 알려 주었다.
세월이 만들어 준 그리움. ---「종려나무 숲/세월의 기억을 이기지 못하고」중에서
사람과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이 한정된 시간 속에 든, 일종의 비극이라는 것은 진리이다.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므로, 그것을 알고 있으므로. ---「사과/내 마음의 지도」중에서
영화는 보이지 않는 시간과 내면을
구체적인 모습으로, 우리 앞에 펼쳐주는
마음의 지도임을 이제야 알겠다. ---「사과/내 마음의 지도」중에서
임무를 묵묵히 수행하는 사람이야말로 21세기가 요구하는 영웅이다.
아니, 그것은 초라해지는 인간을 구원하는 최소한의 행위이다.
초라하지 않은 인간이란, 크건 작건 보편적 대의명분과 윤리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다. ---「가가서리/자연이 인간을 부를 때」중에서
삶, 사랑, 에로스:죽음, 증오, 타나토스는
정반대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같은 것이다.
서로의 영역에게 타자로 변장하여 우리 주변을 맴도는 인간 삶의 원리. ---「플로이(Ploy)/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중에서
욕망이라는 이름의 대결에서 불순물이 섞인 욕망은 이길 수가 없다.
설령 그 목적이 대의를 위한 것이고, 윤리적이라 해도 말이다.
사실 인간 욕망의 가장 순수한 윤리는 욕망에 충실한 그 순간일 뿐이다. ---「색, 계
/욕망의 윤리」중에서
우린 그렇게 다들 유한한 시간 속에 살아갈 사람들이다.
그 시간을 채우는 건 서로에 대한 배려와 사랑뿐임을, 또 이렇게 알게 된다. ---「도쿄타워/시간이 지는 이 자리」중에서
저녁 지는 해를 보면서 늘 그렇게
뭔가 소중한 걸 잃어버린 듯한
그리움에 빠지는 것도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우린 그렇게 다들 유한한 시간 속에 살아갈 사람들이다.
그 시간을 채우는 건 서로에 대한 배려와 사랑뿐임을,
또 이렇게 알게 된다. ---「도쿄타워/시간이 지는 이 자리」중에서
여기에 필요한 건 바로 용기다. 전 세계가 이 영화에 찬사를 보내는 건,
감독과 배우들, 변화를 총총히 진행해 가는 수많은 무명의 남녀들이 보여 준 용기 때문이다.
그들의 용기 앞에 ‘오프사이드’ 반칙이라고 휘슬을 불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오프사이드/울타리를 넘어 어울림으로」중에서
기성세대는 무엇을 그렇게 기억하려 애쓰는가.
새로 운 시대가 열리려면 이전 세대는 상징적인 죽음을 겪어야 한다.
그것이 문화와 역사의 흐름이다. ---「유리의 성/과거, 그 불꽃의 계절」중에서
화면 가득 펼쳐지는 편안한 자연의 모습,
밤하늘 전철 지나가는 장면처럼 가끔씩 허를 찌르는 얘기들,
할아버지가 부르는 말도 안 되는 엔카도 어느 한 순간 조용히 마무리된다. ---「녹차의 맛/푸른 삶의 향기」중에서
이렇듯 시간의 가치는 한정적 질량이 아니라,
변함없는 사랑의 지속성으로 판단되어야 할 것이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순간을 영원으로 이끄는 아름다운 존재」중에서
삶의 무한한 시간은 현재의 한 순간에
도달하면 구체적인 존재가 된다.
그래서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들이 완전 무로 귀결될 것 같지만,
그 시간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끝이 없는 시간의 직선은 서로를 연결하는
마음과 사랑으로 투영된다면 절대로 멈추는 법이 없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순간을 영원으로 이끄는 아름다운 존재」중에서
긴 역사의 어느 한순간 내 존재를
아낌없이 바쳐 살았다는 사실,
그것이 바로 불멸의 증거이며
신조차 시기하는 인간 필멸의 아름다움이다. ---「트로이/그대, 불멸을 원하는가!」중에서
우리는 작은 존재에 불과하다.
그런 우리가 삶에서 기댈 수 있는 건 작은 변화뿐이다.
과연 이번 여행에서 얻은 작은 변화는 무엇일까?
이제 죽음밖에 남지 않은 삶, 돌아보니 내 삶이 누구에게라도 도움이 되었던 적이 없구나. ---「어바웃 슈미트/우리 모두 여기에」중에서
“너에겐 무대가 있는 극장이 리얼리티이고, 세속 인간의 삶은 판타지에 불과해.”
이 말은 줄리아의 삶을 돌고 돌아 마침내 욕망과 열정에 충실한 연기로 기립 박수를 받은 그녀에게 마이클이 던지는 대사로 절정에 이른다.
“당신의 리얼리티는 연극 무대 속에 있어!”
교묘하게 진실에 접근하는 그 틈새가 다시 한 번 통쾌하다. ---「빙 줄리아/내 안에 내가 있다?」중에서
“한밤중 뒤뜰에 홀로 나와 있으니 저 멀리까지 나의 생각들이 뻗어간다
아름답고 온화한 신이 내 곁에 있어 옛 유다의 언덕을 걷노라니 쏜살같이 공간을 뛰어 넘고 하늘과 별들을 따라 달리니…”
라는 부분이 그림과 서로 일치하는 부분이다.
하늘과 별과 영원, 그 속에 서 있는 나.
동천(冬天)에 뜬 검푸른 별과 달처럼 명징하고 깨끗한 순간을 노래하고
그림으로 남긴 두 예술가의 혼이 마치 곁에 머무르는 듯 마음이 설렌다. ---「사랑하는 애너벨/내 안의 별을 찾아서」중에서
고요하게 흘러가는 강물과 침묵을 지키는 바위 아래에 놓인
그 진리가 인간의 맥락에서는
결코 고요한 침묵의 존재가 아님을 이 영화는 몸소 보여 준다.
(…중략…)
자, 인간의 삶이 고요와 침묵으로 일관할 수 없음은
반석의 진리임을 다시 한 번 알게 되노니. ---「흐르는 강물처럼/고요의 창(槍)을 관통하는 아담」중에서
미학과 현실, 죽음과 아름다움이 교차하는
미묘한 이 순간은 이름 모를 무언가에 대한
경외심으로 꽉 차 오른다. ---「흐르는 강물처럼/고요의 창(槍)을 관통하는 아담」중에서
이 영화가 오직 축구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오히려 다른 문화와 사회, 인간관계 속에서
좌충우돌 꿈을 안고 성장해 가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다. ---「슈팅 라이크 베컴/세상을 향해 이들처럼」중에서
이 영화의 배경, 기차역은 인간의 삶에서 공식적 절차와 사적인 정서가 가장 자주 통과하는 공간이다. 별다른 거부감 없이 매표하고 정해진 시간에 발착하면서 누군가와 만나고, 이별한다. 감독은 매번 하얀 기차 연기를 흩날리는 눈발처럼 화면 가득 그려 낸다.
그리고 마지막엔 잿빛 폭발 연기로 뒤덮으며 인간의 삶을 휘감고 있는,
보이지 않는 희비극적 힘을 암시한다. 나치 치하의 영화 속 시대적 배경과 공산 치하 민주화 운동을 하던 실제 제작 시기도 이 영화를 다양하게 해석하는 실마리가 될 것이다.
‘가까이서 본 열차’는 곧 ‘가까이서 본 삶’을 은유하는 장치가 아닐까. ---「가까이서 본 기차/밀로스에겐 특별한 게 있다」중에서
과거에 스스로가 무너질 정도로 힘겨운 상처(트라우마)를 겪었던 사람은 부지불식간에 어느 때,
그것과 비슷한 상황에 다시 처하게 된다. 그때 인간은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첫째, 과거의 상흔에 억압되어 다시 그때와 똑같이 무기력하게 무너진다.
둘째, 과거의 상흔을 딛고 강한 주체로 우뚝 선 사람은 그 상흔을 제대로 인식하고서 패배자에서 승리자의 자리로 올라선다. ---「귀향/그녀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중에서
누구나 자기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진리를 인식하지 못하고 시간을 잃어버리는 일만큼
고통스러운 일이 없을 거라는 데 동의할 것이다. ---「오네긴/시간이 전하는 진실」중에서
신은 이 세상 최고의 예술가이다. 그의 예술로 세상이 탄생하고,
세상은 복잡 다양한 만물들이 희로애락의 삶을 살아간다.
행복이란, 창조주가 세상을 만들어 냈듯이 자신의 삶을 창조적으로 구성해 갈 때 발생한다. ---「바베트의 만찬/행복으로의 초대」중에서
그들이 예정된 수순처럼 밟는 하룻밤의 짧은 사랑은 애절함이나 절박함이 아니라,
무언가 채워지지 못한 결핍의 몸짓이다.
“우린 옛날에도…”라는 여자의 말은 과거를 빌려 현실을 채워 보려는 허술한 자기 연민이다. ---「낯선 여인과의 하루/시간과 마음의 기괴함」중에서
인간이 내딛는 모든 과거의 발자국이 최종적으로 어디를 향해 갔는지
또 한 번 우리에게 절실히 다가온다. ---「엘리자베스/절대 고독」중에서
당신의 크리스마스는 어떤 모습일까?
이 질문은 이런 뜻으로 환원될 수 있을 것 같다.
“당신 삶의 고통과 사랑은 어떤 모습입니까?” ---「러브 액츄얼리/당신의 크리스마스는?」중에서
어쩌면 수전 손택의 말처럼 예술로 재현된 영화와 시를 이해할 때엔
훨씬 보편적이고 차이를 존중하려 하지만,
정작 내 삶에 대해선 말할 수 없이 편협하고 촌스러워지는 걸 그만 인정해야겠다.
---「에필로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