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설탕처럼 굳은 겨울 추위를 쇠망치로 조금씩 깨뜨려나가듯, 안개가 자욱한 현관에 금속음이 울립니다. 시설의 현관 옆에는 오도카니 파출소처럼 지어진 수위실이 있고, 그 입구에 조그만 종이 달려 있습니다. 아마 수위 아저씨겠지요, 키가 크고 장대처럼 마른 남자가 종에 늘어뜨려진 줄을 좌우로 흔들고 있습니다. 그게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안개 너머로 사람 그림자가 어렴풋이 떠올랐습니다. 그 모습의 윤곽이 점차 뚜렷해지더니 이쪽을 향해 한 사람, 또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왔습니다.
모래시계의 모래가 다 떨어졌습니다. 스기에가 포트에 넣은 홍차와 데워진 찻잔 두 개를 쟁반에 올려 가져왔습니다. 포트도 찻잔도 흰색 바탕에 진한 청색의 당초무늬가 디자인되어 있어 ‘중국제인가’ 하고 가와시마는 생각했습니다.
“로열 코펜하겐.” 스기에는 찻잔에 홍차를 따르면서 의아하게 보고 있던 가와시마에게 말했습니다.
“아아, 로열 코펜하겐.” 가와시마는 이렇게 맞장구를 쳤습니다만 사실 그게 지금 자신이 궁금해한 찻잔의 이름인지 홍차의 종류를 말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남자와 관련해서 실패도 많았고 슬픈 일도 정말 많았어요. 속기도 하고 배신당하기도 해서, 이제 정말 남자 따위 웃기지 마라, 평생 남자 같은 건 없어도 좋아! 하고 생각한 적도 여러 번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 말할 수 있는 것은 괴로운 일도, 슬픈 일도, 물론 즐거운 일도 경험해왔지만, 여러 가지로 그런 일이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요. 정말 여러 남자를 만났다고요. 하지만 그 사람들한테서 받은 것도 많다고 말이에요.”
“원피스를 사준 오라버니하고는 사이가 좋았습니까?”
“그럼요, 마지막까지 사이가 좋았어요.”
“오라버니는 이미······”
“네. 3년 전에요. 제가 임종을 지켰어요.”
마지막으로 이런 한마디를 던졌을 때의 다타라 씨 표정은 그때까지의 소녀처럼 웃는 얼굴과는 달리 아이를 잃은 어머니처럼 보였습니다.
기록으로 남겨진 자신의 모습은 모조리 기억을 배반했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술을 마시고 회사의 부하 직원들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을 자랑하는 천박한 짓을 한 기억도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은 좀 더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화면에 비치는 자신은 소년 시절도 청년 시절도 똑같이 허세를 부리고 행동이 따르지 않는 경솔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고를 만한 추억을 단 하나도 찾을 수 없는 게 아닐까?’
“저래서는 살아 있는 건지 죽은 건지 알 수가 없네요. 매일 밥 먹고 신문 보고 텔레비전 보다가 자는 일의 되풀이, 그것뿐입니다. 바뀌는 거라면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는 것뿐이라서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똑같습니다.” 와타나베 씨는 나머지 여덟 개의 테이프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 시간의 축적을 행복으로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와타나베 씨한테는 지루하다고밖에 느껴지지 않는 생활도 저 같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무척 부럽습니다.”
시오리는 순간적으로 그녀들 옆으로 다가가려고 하다가 걸음을 멈췄습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이 너무 즐거워 보였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예전에 그곳에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이미 거기에 없다는 것을 그녀들은 완전히 잊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시오리 따위는 처음부터 거기에 없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시오리는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자신이 존재하지 않게 된 후에도 사람들의 생활은 전과 다름없이 되풀이되고 있었습니다. 죽은 지 1년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이미 자신이 살았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 당연한 것이 마음의 거스러미를 건드렸습니다.
“달은 참 재미있어요. 원래 모양은 항상 같은데도 빛이 닿는 각도에 따라 모양이 여러 가지로 바뀌어 보이니까요.”
시오리는 역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알고 있었어요? 달은 태어나고 나서 계속, 지금도 조금씩 지구에서 멀어지고 있는 모양이에요. 매년 3센티미터쯤인 듯하지만요. 그래서 앞으로 수천 년이나 수만 년 지나면 지구에서 보이는 달은 주위에 있는 작은 별들하고 구별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고 하네요. 아니, 이 이야기 진짜예요.”
찻잔 두 개를 든 시오리가 나카무라 옆으로 왔습니다. “달 이야기 하러 오셨어요, 제 방에?”
나카무라는 겸연쩍은 듯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고는 그저 가만히 달만 보고 있었습니다.
차 한 잔만 마시고 시오리 방을 나온 나카무라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추운 듯 코트 깃을 올렸습니다. ‘너무 어려웠나?’
“실례지만 그건 그런 건가요? 그러니까 고를 수 없었던 건가요, 아니면 일부러 고르지 않은 건가요?”
이 물음에 모치즈키는 말문이 막혔습니다.
“아니, 왜 그런 걸 묻느냐 하면, 고르지 않는 방식으로 책임을 지는 일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책임, 말인가요?”
모치즈키는 그 말을 되풀이했습니다.
와타나베 씨는 그 이상 많은 말을 하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내 추억은 자기 안에만 있는 거라고 생각했어.’
모치즈키는 자기 안에서 추억이라는 개념이 크게 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살아 있던 22년과 그 후 몇몇 시설에서 보낸 50여 년의 시간을 돌이켜봤습니다. 그러자 그동안 만났던 수많은 직원과 망자들에 더해 촬영을 위해 썼던 무수한 물건들까지 완전히 그 빛을 바꿔 자신 앞에 나타났습니다. 이런 체험은 처음이었습니다.
‘추억은 화석처럼 모양을 바꾸지 않은 채 잠들어 있는 과거가 아니야. 추억은 풍화해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해가는 일도 있는 거야.’
시오리는 모치즈키와 헤어지고 나서 계단을 뛰어올라 옥상으로 갔습니다. 아직 아무도 밟지 않아 새하얀 눈이 융단처럼 깔려 있었습니다. 한동안 멀리서 바라보고 있던 시오리는 입술을 깨물고는 서슴지 않고 걸어가 새하얀 눈을 오른발로 힘껏 차올렸습니다.
까맣게 젖은 옥상의 콘크리트가 그곳만 드러났습니다. 어렸을 때 아스팔트에서 넘어져 살이 까지고 피가 밴 무릎처럼 애처롭게 보였습니다.
‘제기랄, 제기랄.’ 시오리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치면서 옥상의 눈을 계속해서 찼습니다.
발이 걸려 넘어져도, 굴러도 발길질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아주 조금밖에 남지 않은 옥상의 하얀 눈이 오렌지색으로 물들기 시작해도 시오리는 눈과의 격투를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없어지는 거죠?” 모치즈키의 눈을 보지 않고 시오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치즈키도 잠자코 그녀를 보았습니다.
“고르려는 거죠? 전 알아요. 그 사람하고의 추억을 고를 거죠?”
모치즈키의 얼굴은 그림자가 져서 어떤 표정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왜 그런 일을 도왔을까요? 바보같이.”
두 사람 사이에 긴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모치즈키였습니다.
“난 그때 자기 안에서 행복한 순간을 필사적으로 찾았어. 그리고 50년이 지나 어제야 비로소 나도 다른 사람의 행복에 참가했다는 사실을 안 거야. 그건 무척 멋진 발견이었어.”
모치즈키는 조용히, 그러나 확실한 어조로 이야기했습니다. 시오리에게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 같았습니다.
“너도, 너도 아마 언젠가는 그럴 때가 올 거야.”
찰칵 하는 커다란 소리와 함께 상영이 갑작스럽게 끝나고 화면은 깜깜해졌습니다.
불과 30초쯤 되는 시간이 시오리에게는 몇 시간처럼 느껴졌습니다. 어둠 속에서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시오리는 조금 전까지 왼쪽 어깨에 분명히 닿고 있던 느낌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불이 켜졌습니다.
옆에는 이제 모치즈키가 없습니다.
시오리는 좌석에 앉은 채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비추고 있지 않은 스크린을 보고 있었습니다. 누군지는 몰랐습니다만 그런 시오리의 어깨를 뒤에서 두 번 톡톡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시오리는 어떤 얼굴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돌아보지도 못한 채 앞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