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솝 우화의 매우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대부분 등장인물의 말로 끝난다는 점이다. 그러한 형식은 이후 우화 장르의 중요한 전통이 되었고, 그 영향은 카프카의 짧은 우화적 텍스트에까지 나타난다. 우화에서 이야기를 종결짓는 인물의 최종적 말을 종사라고 명명해보자. 종사는 다양한 기능을 수행한다. 그것은 「여우와 신 포도」에서처럼 반어적 문맥 속에 놓일 수도 있고, 더 나아가 인물의 어리석음, 뻔뻔함, 사악함, 비겁함 등과 같은 성격적 특징을 표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역시 가장 대표적인 유형은 일어난 사건에 대한 결론적 논평으로 기능하는 종사일 것이다. 이 경우 종사는 우화 자체의 메시지, 즉 교훈을 대신한다. --- p.17~18
주인과 사냥개 사이의 논쟁 구도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뭔가를 하게 하려는 사람과 그것을 실제로 수행해야 하는 사람 사이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너는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안 하려고 하느냐? 나도 하려고 한다. 하지만 할 수 없는 걸 난들 어쩌란 말이냐. 실생활에서 흔히 일어나는 이러한 논쟁은 주인과 늙은 사냥개의 우화에서와는 달리 대부분 잘 결론이 나지 않는다. 의지와 능력은 객관적 관찰이 어려운 인간의 내적 상태에 관한 것이라서 무엇을 하지 못하는 것이 의지 때문이냐 능력 때문이냐는 결국 주관적 해석의 문제로 귀착하고 만다. --- p.72
욕망이 이성의 작용을 방해한다는 것은 모순적이다. 욕망은 실제로 충족되고자 하는데,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환상이 아니라 오직 정확한 인식뿐이기 때문이다. 까마귀 이야기에서처럼 욕망은 이성과 조화를 이루며 협력할 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그런데도 욕망은 흔히 이성과 갈등 관계에 빠지고, 터무니없는 환상을 낳고, 비둘기의 경우에서 보듯이 주체를 자기 파멸의 길로 몰아가기까지 한다. 비둘기는 결국 갈증을 해소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신세까지 완전히 망쳐버린다. 욕망은 왜 욕망의 충족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환상을 지어내는 것일까? --- p.107
모방자는 무엇이 동일한 것인지, 무엇이 다른 것인지를 판단하지 못한다. 동일성과 차이는 눈에 직접 보이는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볼 수 있어야만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 알 수 있고, 그러한 토대 위에서만 의미 있는 모방이 이루어질 수 있다. 설화나 우화 속의 모방자들이 보지 못한 것은 바로 주인공의 친절한 마음, 연민, 정직성 등이다. 그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까닭에 상황의 동일성과 차이를 제대로 분간할 수 없었고 결국 서투른 모방, 즉 과다 모방과 과소 모방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 p.152~153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나 지식의 체계와 모순되는 사태나 현상에 직면했을 때 호기심을 느낀다. 수수께끼가 흥미를 끄는 것은 이 때문이다. 수수께끼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세계에 대한 상식과 충돌한다. 수수께끼는 우리의 안정적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상식의 체계를 위협하기 때문에 시급히 해소되지 않으면 안 된다. 수수께끼를 푼다는 것은 수수께끼와 상식을 화해시킨다는 것, 양자를 양립 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 p.162
이솝 우화의 세계는 속임수와 배신과 악덕이 만연해 있는 세계다. 악한의 계략은 도처에서 삶을 위협하고 있다. 그런데 악한은 언제나 선의를 가장하고 주인공에게 접근한다. 악덕은 숨겨져 있다. 악덕이 표면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야기의 긴장이 발생한다. 그리고 이 긴장이 해소되는 것은, [……] 악덕이 악덕으로서 폭로될 때다. [……] 이솝 우화의 목표는 세계의 진상에 대한 인식이고, 그것은 미화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현실, 즉 이기심과 탐욕, 어리석음, 약육강식의 논리로 얼룩진 현실을 직시하는 데서 온다. (33. 「늑대, 엄마 염소, 새끼 염소: 언어와 현실, 또는 우화와 동화 (2)」, 203~204쪽)
신화적 세계 속에서 신탁은 신의 게임이었고, 인간은 그 속에서 놀아나는 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협잡꾼」 우화에서는 인간이 신에게 게임을 제안하고, 게임에서 결코 이길 수 없음을 우려한 신이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형국이 된다. 주석가들은 이 우화에 ‘신의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고 하며 협잡꾼을 나무라는 듯한 교훈을 붙였지만, 바로 이 우화야말로 신의 영역을 침범하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승인하며, 신탁을 패러디하고 있는 것이다.
--- p.226~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