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다잉은 다시 말해 존엄사, 풀어쓰면 삶의 아름다운 마무리다. 따뜻함, 안온함, 사랑, 사람다움 그리고 이별의 기억, 그 모든 것들이 다 담겨 있다. 이제는 인간의 가치와 존엄을 위해 모두가 죽음을 이야기해야 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2018년 2월부터 시행되는 웰다잉법(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을 둘러싸고 크고 작은 사회적 마찰을 줄여나가기 위해서는 죽음에 관한 토론과 교육이 필요하다. 이 책으로 삶만큼 중요해진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폭넓게 이루어졌으면 한다. --- p.8
아내와 딸이 세상을 떠난 뒤 나는 항상 배낭을 챙겨두었다. 수트케이스도 언제나 대기 중이다. 하루하루 삶이 버거워질수록 누군가는 나더러 마음을 비우라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쉬운 일이 아니다. 비우는 대신 그리움을 집에 내려놓고 여행을 하기로 작정했다. 비우는 것과 내려놓는 것은 무엇이 다를까.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움은 아픔으로 남았다. 아픔의 자리를 외과 의사가 말끔히 도려내듯 수술하는 것이 ‘비움’이라면, 정신과 의사가 환자의 증상을 지켜보며 치료하는 것을 ‘내려놓음’의 출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여행을 통해 어느샌가 내려놓음을 선택하는 방법을 배웠다. 길을 떠날 때면 나는 마음 한쪽을 내려놓는다. --- p.16
이런 개인적인 경험 때문일까. 나는 지난 10여 년 동안 우리 사회에서 툭 하고 내던진 ‘치유’라는 단어가 몹시 거슬렸다. 사람들이 쉽게 내뱉는 ‘힐링’이라는 말에도 반감이 들었다. 그런 겉치레 같은 말이 나를 더욱 슬프게 했다. 깊이 상처받은 이들에게 서툰 위로는 자칫 상처를 더 깊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상처가 스스로 아물 때까지 기다리는 ‘내려놓기’가 필요한 것이다. 죽음 뒤에 남을 그리움까지 준비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아름다운 마무리가 되지 않을까. --- p.19
가상이라 하더라도 생사의 경계선에서는 가족들이 부모의 연명의료를 반대한다는 의견을 내놓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자칫 “빨리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라는 말로 들려서 오히려 노여움을 살 수도 있다. 존엄사를 강조하는 부모에게조차 침묵을 지키는 것이 자식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자세일지도 모른다. 우리 가족의 경우 지금까지 아들 내외가 서약서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은, 서로가 각자의 삶에 책임을 진다는 당연한 사실보다, 내가 언젠가 맞이할 죽음에 관한 문장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문제는 내 뜻대로 끌고가는 것이 가족의 심적 부담을 덜어주는 길이겠다 생각했다. --- p.47
생각해보자. 만약 내가 죽을 때까지 살아 있다면 이 같은 선택이 쉬울까? 어둡고 긴 고통의 터널에 갇혀 외마디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괴로워하다가 숨을 거두기 십상이다. 나를 돌보던 가족에게는 씻어낼 수 없는 악몽이 될 것이다. 가족 중 어느 누구도 추억하기 싫은 죽음이자 불행한 유산이 될 게 틀림없다. 그래서 나는 연명의료를 거부한다. --- p.88
인생의 주요 고비마다 자기 스스로 매듭지어야 할 일이 많아요. 자기결정에 따른 것이지요. 인생의 마지막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마지막 임종과정에 접어들었을 때는 자연의 섭리에 따를 것인지, 아니면 연명치료에 들어갈 것인지를 결정해두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써두고 가족에게도 설명해주어야 합니다.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않으면 누군가가 나를 대신해서 내 죽음에 개입해버리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내 죽음을 가족이 결정해버리거나 의사가 내 죽음에 개입하게 내버려두는 것이지요. 왜 나에게 주어진 자기결정권이라는 권력을 그냥 버려야 하나요? 여러분의 죽음을 남에게 맡기겠습니까? --- p.162
“여러분은 진정으로 환자를 사랑하는 가족의 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체면을 위해, 또는 가족, 친지와 주변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환자의 희망과 달리 무작정 연명의료로 들어간다면 이것이야말로 맹목적 효도가 되지 않을까요. 환자의 유언을 배반하지 마세요. 확신을 가지고 환자의 뜻을 존중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