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력은 보는 대상에 감정이입을 하거나 감탄할 줄 아는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감탄하는 마음이 관찰의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관찰이라는 행위 안에는 사랑의 성분이 분명 들어 있습니다. 저는 대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수십 년째 카페나 지하철에서 관찰 크로키를 하고 있는데요. 우리가 흔히 못생겼다고 치부하는 사람을 발견하게 되면 전 그 사람만이 가진 선과 형태감에서 아름다움을 찾아요. 그림 그리는 사람들 특징 같기도 한데 사실 전 모든 존재는 아름답다고 믿습니다.
--- p.27「‘관찰하는 시선’ 조엘 졸리베」중에서
여섯 살 때 부모님이 비로소 제 장애를 인지하고 보청기를 달아주셨는데요. 보통 아이들과 어울려 일반 학교를 다녔는데 초등학교 3학년 때 유급도 당했을 만큼 또래를 따라가는 게 쉽지 않았어요. 늘 외롭다고 생각했고, 절대 행복해지지 못할 거라고 좌절한 적도 있었습니다. 유년기에 제 머릿속에는 늘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어떤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지금 애들이 왜 다 웃는 거지?” “이게 뭐지?”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저러지?” “저건 뭐지?” 질문하는 목소리였죠. 부족한 청각 정보를 눈치로 메우고 상황을 파악하려면 그 수밖에 없었습니다. 살아남기 위한 불가피한 습관이었는데 그 목소리는 조금 잠잠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제 안에 있답니다. “왜?” “어떻게?”라는 질문은 지금도 늘 스스로에게 던지며 삽니다.
--- p.43「‘상상을 만드는 질문’ 키티 크라우더」중에서
자기 안에 함몰되기보다 세상을 바라보고,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새로운 경험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가는지 봐야 합니다. 그래야 한계를 조금씩 깨면서 성장할 수 있어요.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보면 어떨까 상상해보는 게 공감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공감 능력이 없으면 상상도 허약해질 수밖에 없답니다. 일례로 제가 “리타와 마샹” 시리즈를 그릴 때, ‘내가 리타였다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하는 질문을 하도 많이 하니 나중에 ‘리타는 이런 목소리 톤을 가진 꼬마일 거야’ 하며 목소리까지 들리는 경지에 이르더군요. 인물이 생생하게 살아 숨 쉬었죠. 공감 능력은 상상에 숨을 불어넣고 생각에 디테일을 더해줍니다.
--- p.85「‘공감의 쓸모’ 올리비에 탈레크」중에서
저는 우리가 쉽게 현실이라고 이름 붙이며 묘사하는 내용이 얼마나 현실에 가깝냐고 질문하는 겁니다. 스코틀랜드 네스 호에 산다는 괴물 ‘네시’ 이야기 아시죠? 각국에서 탐험대를 파견하는데 연구자마다 외양에 대해 서로 다른 묘사를 내놓습니다. 자기 머릿속에 있는 걸 본다는 뜻이에요.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 아는 것을 봅니다. 저에게 상상은 허황된 게 아니라, 현실을 해석하는 또 하나의 설명입니다. 현실을 묘사하는 방식과 관점이 무척 다양할 수 있다는 것, 단 하나의 정답지 따위는 없다는 걸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상상 세계를 그립니다.
--- p.109「‘치유하는 상상’ 클로드 퐁티」중에서
전 창의성이 그저 무언가를 할 용기를 의미한다고 생각해요. 단지 그것뿐이에요. 스스로에게 무언가 해보는 것을 허락하는 마음, ‘왜 안 되겠어’ 하는 생각, ‘실패해도 괜찮아. 별거 아냐’라고 말해주는 자세. 이것이 창의적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유일한 차이예요. 제 비법은 이래요. 학교 쉬는 시간 때 가졌던 태도와 자세를 기억해내는 겁니다. 쉬는 시간에 애들하고 놀 때, 대단히 큰 결심이 필요한 건 아니잖아요. 그냥 그렇게 내 앞에 있는 상황과 논다는 생각으로 덤비는 거죠. 노는 마음이 중요해요. 유희하는 마음은 여유를 낳고, 여유는 작은 용기를 낳으니까요. ‘나는 지금 노는 거야’라는 생각을 가지면 요리, 친구와의 모임 등 삶의 여러 영역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고 싶어지고, 창의성을 표출하고 싶어져요.
--- p.145「‘작은 용기’ 세르주 블로크」중에서
결점과 함께 창작한다는 건 다시 말해 ‘완벽하게 하려고 하지 말고, 다른 누군가가 되려 하지 말고, 내 이야기를 하자’라고 결심한다는 뜻이죠. 물론 말처럼 쉽지만은 않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좋아 보이는 다른 사람의 결과물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타인의 부족함은 관대하게 이해하고 오히려 그 서투름에서 매력을 발견하면서 스스로에게만 유독 가혹한 잣대를 들이밀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제가 다른 창작자들 작품에서 감동받는 지점은 기계 같은 완벽성이 아니라 인간적인 빈틈이거든요. 우리가 똑같지 않은 이유도 그 빈틈과 서투름에 있고요. 그걸 소중히 여겨야 해요. 만약 모두가 완벽한 그림을 그리게 된다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그림이 전부 완벽하게 지루할 겁니다.
--- p.175「‘결점에서 태어난 창의성’ 벵자맹 쇼」중에서
길에서 배수로를 따라 흘러내려 오는 막대기나 아스팔트 모양 등을 물끄러미 지켜보면서요. 종이에 낙서를 해서 동네 가게 입구마다 포스터처럼 붙여놓기도 하고요. 스펙터클하고 특이한 것이라곤 없었어요. 할 게 없고 심심했기 때문에 종이, 돌멩이 같이 별것 아닌 일상 속 물건과 함께 노는 법을 깨우친 것 같아요. 아이들은 심심하면 알아서 자기만의 방법으로 재미를 찾게 되어 있거든요. 지금도 저는 심심함과 시간의 공백을 좋아해요. 비행기 탈 때 아이디어가 가장 많이 샘솟는데 그건 공항에서 무료하게 기다리는 시간이 있어서예요. 자신에게 심심할 틈을 주는 건 창작자에게 있어 무척 중요한 일이랍니다.
--- p.198「‘깊은 심심함’ 에르베 튈레」중에서
몽상은 창조적인 사고를 키워내는 둥지입니다. 몽상은 세상을 다르게 보고, 오래 보고, 이면에 대해 질문하는 시간이죠. 한 정신 상태에서 다른 정신 상태로 이동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랍니다. 쓸모에 맞춰 효율적으로 이동, 이동, 이동…… 이런 식으로는 창조성이 발휘되지 않아요. 영감이 어디에서 오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데, 저는 몽상하며 온다고 답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자주 ‘내가 뭔가를 하고 있다’라는 느낌에 속습니다. 예를 들어 손을 놀려서 그림을 그리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시간을 쓸모 있게 썼다는 느낌을 받아요. 그 느낌에 속기가 쉽죠. 저는 선택하고 버릴 줄 알아야 정신이 중심을 잡고 창의적인 생각을 할 수 있다고 믿어요.
--- p.223「‘다르게 보기, 오래 보기’ 안 에르보」중에서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어릴 때부터 정확히 알고 확신을 갖는 게 가능한가요? 어릴 땐 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 잘 몰라요. 생각하고 탐험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죠. 때때로 이것저것 해봤는데 ‘다 아니다’ 싶을 수도 있어요. 어떤 확신이 있어서 프랑스로 온 게 아니라 저에게 탐험할 시간을 주려고 온 것이에요. 일본에 있을 땐 요리도 좋아했고 피아노도 쳤어요. ‘이게 내 길일까?’ 스스로에게 질문하면 ‘모르겠는데’라는 답이 돌아왔죠. 그땐 제가 그림을 그릴 줄 안다는 사실조차 몰랐어요. 꿈이 뭔지 잘 모르겠으니까 손에 잡힐 때까지 탐험하는 데 시간을 쓰기로 결정한 거예요. 성숙해지려면 시간을 써야 해요. 생각할 시간을 허락하지도 않고 꿈을 찾으라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죠.
--- p.258「‘시간 사용법’ 이치카와 사토미」중에서
아버지가 지어놓은 비평의 감옥 안에서 힘들어했던 청소년기와 시간이 준 선물 덕에 관점이 완전히 달라진 지금을 비교해보면 가장 큰 차이는 단점을 대하는 태도예요. 예전엔 부족함을 어떻게 채울까에 혈안이 되었었다면 지금은 단점이 관점에 따라선 강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한 가지 면에 미흡해도 다른 면에선 충분할 수 있다고, 우리 안에 이미 충분한 가능성과 힘이 있다는 메시지를 책에서 전하고 싶어요. 다른 누군가가 되려 하지 않고 비로소 저 자신으로, 제 자리에서 온전히 행복한 사람이 된 지금의 제 경험담을 담아서요.
--- p.299「‘자기 믿음’ 베아트리체 알레마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