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경남 고성군 고성읍 '그느리'에서 출생. 우실이 그늘이 짙게 드리워진 마을이라서 그느리란 이름이 붙여졌다(우실이란 지킴이 구실을 하면서 마을 앞에 줄지어선 숲이다). 유치원에 들어가기 조금 이전부터 고등학교를 마치기까지 줄곧 부산에서 자라는 동안, 고향은 그느리라는 이름만으로도 정적과 안식을 머금은 이미지 그 자체였다. 서울 가서는 대학에서 시와 민속학을 공부한 것도 정신과 영혼의 쉼터를 구한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대학을 다니는 동안, 어머니의 '언문 제문'은 영혼의 쉼터에 대한 또 다른 화두 노릇을 한 것 같다. 중서부 경남 일대에서 언문 제문은 대표적인 '여성 문장'이다. 언문 제문은 친정 부모의 상청(喪廳)에서 따님들이 한글로 지어서 읽은 제문이다. 일가들 사이에서 더러 '고성의 여자 문필가'로 일컬어지기도 했던 어머니는 남을 위해서 대필한 것까지 해서, 작은 궤짝 하나 가득 언문 제문을 갖고 계셨다. 그러시다가 당신의 삶에 애달픔의 비안개가 서리거나 하면, 두루마리를 몇 개씩이나 펴들고는 울먹이시듯 읽어나가곤 하셨다.
슬픔, 고통, 그리고 무엇보다 회한을 풀어나가던, 어머니의 제문, 곧 '죽음의 글'은 드디어는 달램의 웅얼거림을 끝맺곤 했다. 그것은 나의 또 다른 그느리였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며 에드바르드뭉크, 그리고 구스타프 말러에 이르는 죽음의 시학과 회화예술과 음악에 홀려 있는 동안에도 늘 어머니의 언문 제문의 낮은 메아리가 들려오곤 했다. 이 책에도 그 메아리의 여운과 그느리의 그늘의 기척이 깃들여 있기를 바란다. 고향에 돌아온 지가 어언 십 년이 되는 보람도 거기 있기를 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프롤로그 한국인의 죽음을 위한 서설
인간은 목숨이 지는 그 찰나 이전부터 오랫동안 이미 죽음을 갖는다. 인간은 죽음과 따로 살아가는 게 아니다. 인간은 죽음을 대단히 인위적인 것, 매우 인공적인 것이 되게 하였으며, 죽음을 만들고 생산했다.
돌아가신 이들을 가족구성원의 일부로 여기고 그들을 섬기는 한국인의 효에 대해서, 우리가 흔히 ‘열녀’라고 부르는 사람의 이면의 모습까지, 죽음을 문화로 가꾸어온 한국인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
제1부 거듭 되새기는 죽음들
우리들이 죽은 이를 떠나보낼 때, 우리들의 죽음 또한 떠나보내고자 한다. 그것에 우리는 길들어 있다. 나만의 죽음조차도 이방인 대하듯 하기 마련이다. 언제 어느 때, 죽음이 나그네처럼 찾아들기 전까지 우리들 각자의 죽음은 멀고먼 낯선 곳에 웅크리고 있을 또 다른 이방인에 지나지 않는다. 이리하여 삶과 죽음은 서로 이방인이다. ‘없는 거야. 없다니까! 없다는데도! 죽음은 없는 거야.” 삶이 죽음에게 건네는 오직 한 마디. 아픈 마음의 상처처럼 억지를 부려서라도 죽음을 망각하면서 산다면 그것은 무척이나 서글픈 일이다. 그러나 잊는 것은 일시적인 미봉책일 뿐, 우리들 삶 속에서 이 모순은 반복이 되고, 우리들은 그 속에서 놓여나지 못한다. 1부에서는 죽음의 거울에 비쳐서 더욱더 확연해질 굳건한 삶의 얼굴을 찾고 있다.
제2부 한국인의 죽음, 그 자화상
한국인의 민속과 민간신앙을 통해 한국인의 죽음을 말하고 있다. 가령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라는 속담 때문에 한국인의 죽음에 관한 생각이 유추될 수 있고, 남의 집 부고를 집안에 들여놓지 않는 풍습에서 한국인이 죽음에 부치는 부정관(不淨觀)을 헤아릴 수 있다. 또한 원령신앙에서는 죽음의 공포를 얘기할 수 있고, 꽃받침에 얹힌 꽃망울 같은 형상을 갖춘, 전통적인 분묘에서는 미화된 죽음의 관념을 찾을 수 있다. ‘죽다’라는 단어와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들, 한국인의 다양한 장례풍습, 무덤의 방향, 뼈와 살, 영(靈)과 육(肉)의 의미, 한국 민속신앙 현장에서의 귀신의 다양한 쓰임새들이 소개되고 있다.
제3부 어제의 거울에 비친 오늘, 우리들의 죽음
자신의 죽음이 자신에게서 생소한 것일 때, 그 사람의 삶이 그 사람 자신에게 친연성(親緣性)이 있다고 말할 근거가 있을 것인가? 결국 오늘의 죽음이 우리들 자신에게서도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수많은 가짓수의 전통적인 죽음은 물론, ‘뇌사’, ‘안락사’, ‘자연사’의 정의와 그 현대적 의미, 이승과 저승, 호상(好喪)과 악상(惡喪)의 구분점, 옛사람들이 생각했던 영혼의 개념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오늘의 한국인은 그 삶의 겉모양만큼이나 달라진 죽음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어제의 한국인과 오늘의 한국인은 전혀 다르다. 즉, 문화적·민족적인 동질성을 발견하기조차 힘들고, 아무리 길게 잡아야 두세 세대 이전의 죽음과도 일관된 연관성을 발견하기조차도 쉽지 않으며, 위의 새로운 개념의 죽음의 도입 등으로 우리를 당황케 하기 때문이다.
제4부 죽음의 문화적·신화적 형상
종말로서의 죽음을 삶의 재편으로 전환시키는 것, 그것을 불교식으로 부르게 되면 불퇴전의 용기라고나 할 것이다. 절벽 끝에서 뒤돌아서는 게 아니라,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가는 그 엄청난 일을, 우리는 죽음을 향해서, 죽음과 더불어서 할 수 있어야 한다.
삶과 죽음의 한계를 어쩔 수 없는 것이 보통 인간이다. 인간은 그 한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의 실상을 보게 된다. 매이고 제한된 목숨, 그 불쌍한 몰골에 눈길이 닿았을 때, 인간이 어떻게든 한계를 넘어서고 제약을 이길 길이 없을까를 궁리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언급된 <제망매가>의 생사로(生死路)와 바리데기의 저승 여행 이야기는 소재가 다르고 주인공이 다르기는 하지만, 모두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는 인간 행위에 관한 것들이다. 『삼국유사』의 대성이 이야기에서는 육신이 죽은 뒤 다른 육신을 얻어 삶을 지속하게 된다는 옛사람들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으며, <도화녀 비형랑>과 <수삽석남>에서는 삶의 가장 치열한 상황의 극인 사랑이, 삶의 철저한 부정과 맞겨루면서 얻어낸, 삶의 한계를 넘어서 존립할 수 있는 인간 속성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제5부 죽음을 생각하고 삶을 사랑하고
살아 있는 우리들이 죽음을 위한 시설을 만드는 곳을 향해 “죽은 자들이여, 당장 이곳을 떠나라!”라고 외치는 슬픈 이야기와 함께 ‘빠르게, 가볍게’ 진행되는 요즘의 장의풍속에 대해서 꼬집고 있다. 또한 죽음을 관조하면서 웃음과 유머로 이를 맞는 다양한 예들을 소개하고 있다.
--- 책의 내용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