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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현상학

사람의 현상학

: 사람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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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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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7년 07월 21일
쪽수, 무게, 크기 280쪽 | 438g | 140*210*20mm
ISBN13 9788954645706
ISBN10 8954645704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우리 모두는 어느 때인가 ‘사람’으로서 태어나, 어느 때인가 ‘사람’으로서의 자취를 감춘다. 그러나 우리 모두의 탄생과 죽음을 ‘사람’의 탄생과 죽음이라고 설명할 수는 없다. 생명을 갖고 태어나는 것은 모태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아기의 탄생은 출산이라 말한다. ‘사람’은 항상 끊임없이 생성되고, 또다른 한편 부인된다. 더구나 ‘사람’의 생성은 1차원적인 것이 아니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면서도 ‘사람’으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사람으로서 살고 있으면서도 존재를 박탈당하는 사람도 있다. 또는 스스로 ‘사람’으로서는 죽었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다. (중략) ‘사람’이라는 존재는 애초에 그것 자체가 수많은 차원이나 위상으로 나뉘어 있다. 나아가 거기에는 본인이 의식하지 못하는 것도 적지 않고, 정합적이지도 있고 총괄적이지도 않은 채 파탄이나 모순만 눈에 띄는 일도 결코 드물지 않다. --- p.5~6

미소에 미소로 답하는 것, 즉 ‘사람’의 ‘얼굴’이 출현하는 것…… 그것들이 비록 한쪽에 비스듬히 걸쳐 있다고 해도(내가 파악하는 방식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다른 성좌 속에서 볼 수는 있다. 아기의 얼굴이 표정으로 호응해줄 때 사람은 이 같은 사건과 맞닥뜨린다. 처음으로 서로 ‘얼굴’을 마주보는 것, 그것이 바로 타자와 만나는 일, 누군가와 만나는 일이다. 각자는 특이한 존재로서 인정하는 것(하략). --- p.20

얼굴은 다른 얼굴과 접촉하는 가운데 ‘누군가의 얼굴’이 된다. 이 접촉, 다시 말해 ‘쳐다봐달라는 부름’에서 비켜난 얼굴은 넋이 나갈 수밖에 없다. 그때 얼굴은 얼빠진 채 사람이 없는, 무인의 공간에 내던져진다. 타자의 얼굴이 다가오고, 또는 얼굴로서 타자가 다가오는 것이 내 얼굴을 가능하게 한다. 나를 타자에 대해 얼굴로서 존재하게끔 한다. (중략)
나를 얼굴로서 존재시키는 타자의 얼굴 자체는 나에게 보이지 않는 나 자신의 얼굴이 불러낸 것이다. 마찬가지로 타자의 얼굴은 나에게 보이지 않는 내 얼굴을 지금 불러내고 있을 것이다. 스스로는 서로 보이지 않는 자기 얼굴의 이러한 교환이 얼굴을 마주하도록 불러낸다. 이러한 소환 가운데 나는 ‘나’가 된다. 얼굴이란 실로 타자가 선물로 보내준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얼굴을 소유할 수 없다. 얼굴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도리어 얼굴 안에 ‘나’가 가끔씩 찾아온다. 또는 타자에 의해 얼굴 안에 ‘나’가 강제로 끌려 들어온다.
얼굴의 나타남은 ‘내’ 얼굴로서, 또는 특정한 타자의 얼굴로서 그것을 (내 의식의) 대상으로 축약시켜버리는 ‘소유’의 시선에서 벗어나야 한다. “얼굴은 소유에 저항한다”는 말도 레비나스가 한 말이다. 레비나스가 이 말로 내치고자 한 대상은 무엇보다도 서로 연결로 환원도 불가능한 ‘사람’이라는 복수의 존재를 ‘우리’라는 이름 없는 주체의 집합체로 해소시켜버리는 보편적인 사고, 중립적인 사고였다. 얼굴은 주체가 아니다. 얼굴이 주체가 될 때 그것의 손을 잡고 이끌려 나오는 또 하나의 얼굴은 그 주체의 대상이 되고, 그럼으로써 ‘바깥’으로서의 ‘얼굴’이 주체의 내부에 강제로 수용된다. 다양성을 ‘같음’으로 병합하는 논리가 거기에서 작동하기 시작한다. --- p.51~52

가면은 동일성의 질서 밖으로 사람을 끌어내는 장치다. ‘세계’의 바깥으로 나가기 위한, 즉 ‘초월’을 위한 매개인 가면이 ‘사회’ 내부를 순환하는 ‘얼굴’들을 단순히 미세하게 상호 조정해주는 매개, 즉 사소한 ‘변신’의 매개로 퇴락한 것이 지금의 ‘얼굴’이다. 근대 사회에서 가면은 화장으로 바뀌었다. --- p.60

내 ‘마음’은 내게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내 이름이 그런 것처럼 타자로부터 부여받는 것이다. ‘소중히 여기는’ 것이 ‘마음’을 낳는다고 앞에서 이야기한 것도 그런 뜻이다. 타자에게 소중히 여겨짐으로써 겨우 꾸며지는(모습을 갖추는) ‘내 마음’, 그것은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 소중하게 여겨질 것이라는 식으로만 느낄 수 있다. 롤랑 바르트의 제3의 글이 이를 증언하고 있다. “마음이란 내 손안에 남겨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내 마음에 남겨진 그대로 마음은 무겁고 슬프다. 썰물 같은 생각으로 가득 차 무겁다.”--- p.87

오늘날의 가족은 오로지 갈등이 일어나지 않도록 절치부심해온 결과, ‘친절한’ 가족, ‘친밀한’ 가족이 되었다. 그러나 갑자기 ‘친구’라는 사회적 관계로 옮겨 간다고 만사형통할 리 없다. 갈등 속에서 아이는 자기 존재의 윤곽을 조금씩 확정해나가기 때문이다. 갑자기 사회에 나서게 되면 불확실한 윤곽마저 금세 부서져버린다. 그리고 사회 안에서 특정한 역할을 맡는 대신 자기 존재를 그대로 승인해주는 타자를 필사적으로 찾아 헤맨다. ‘나’라는 존재는 타자의 의식이 향하는 대상이라는 형태로 가장 또렷하게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사적인 관계, 또는 친밀한 개인적 관계에 사람은 각각 ‘나’를 걸게 된다. 개인에게 현대 도시의 생활이란 사회적인 것의 리얼리티가 점점 더 친밀한 범위 안으로 축소되는 과정이기도 한다. 오늘날 아이들에게 ‘친구’ 관계가 턱없이 막대한 의미를 갖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거기에는 누군가와 맺은 관계를 통해 상처를 입는 고통이 신체적인 고통보다 훨씬 리얼하다는 ‘영혼’의 풍경이 반영되어 있다. --- p.103~104

연애가 내가 짜놓은 환상의 총체에 불과한 것일 수 없는 까닭은, 연애란 자신이 어느 타자의 의식을 수신하는 이가 되는 사태이기 때문이다. 내가 ‘타자의 타자’일 수 있다는 것이 ‘나’가 확실한 존재로서 존재하기 위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가리켜 “당신이 곁에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고 말해주는 사람의 존재, 사실은 그 존재에 의해 ‘나’ 자신의 존재가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불특정한 사람의 사랑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은 것이다. --- p.120

소유하는 자는 소유 의지를 물건에 반영시키는 딱 그만큼, 소유물 자체의 구조에 의해 규정받는다. 그 안에서 소유하는 자가 소유하는 물건에 의해 거꾸로 소유당하는 사태가 어쩔 수 없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소유/피소유 관계의 반전이라는 사태다. 타자를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면 할수록 타자의 언어나 동작이나 표정 하나하나의 사소한 변화에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는 것은 질투 하나만 봐도 금세 알 수 있다. 사람은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점유하려고 하지만, 거구로 그것에 점유당하고 만다. 이러한 반전을 봉쇄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이러한 반전이 일어날 수 없는 절대적 소유를 꿈꾸든지, 아니면 반대로 반전을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소유 관계로부터 완전히 탈락함으로써 절대적인 비소유를 꿈꾸는 수바에 없다. --- p.126~127

레비나스가 말한 것처럼 “사랑하는 것, 그것이 타자를 위해 걱정하는 것이며, 타자의 약함에 손을 내미는 것”이라고 한다면, 미움도 ‘타자의 약함’을 겨냥한다. 그때 ‘타자’는 신체가 누군가의 소유물이라는 신체를 둘러싼 소유의 제도, 그것에 근거한 신체의 자기 통제 체제(한마디로 ‘자율’) 아래 있는 타자를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확고한 주체로 보이지만 실은 제도라는 환상에 의해 편제되어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타의 경계, 내외의 경계를 벗어나거나 빠져나가 무엇이라고 한정하자마자 모습을 지워버리는 타자, 즉 대상으로서 규정받는 것을 어디까지나 거부하는 존재로서 타자를 말한다. 신구 가즈시게의 탁월한 표현을 빌리자면 늘 “존재하려고 하되 미처 존재하지 못하고 있는” 타자인 것이다. --- p.130

‘주체’라는 것이 존재의 ‘자기소유’라는 형태로 과연 확보될 수 있을까? ‘소유’의 시선이 우리 존재의 모든 이미지에 침투해간다면, 그런 가운데 소유의 시선이 소유의 주체 자체에 미치는 것을 강력하게 멈추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예를 들어 이 사람이 동일한 사람이라는 연속적인 존재, 한마디로 ‘아이덴티티’에 대한 물음은 대부분의 경우 비탈길에 놓이고 만다. 우선 ‘아이덴티티’는 시간 속에서 신체의 부단한 양태 변화를 관통하는 내가 ‘나’로서 지니는 동일하고도 지속적인 존재를 가리킨다고 말해놓자.그러한 ‘나’의 동일한 존재는 이미 없어진 과거의 온갖 ‘내’ 체험을 내가 기억이라는 형태로 소유하고 있는 가운데 근거를 지닌다. (과거의) 의식의 자기소유안에서 ‘나’라는 동일한 존재의 근거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소유의 ‘주체’인 자기 자신도 이렇게 ‘소유’의 시선에 몸을 드러냄으로서 주체로서 붕괴해가지 않을 수 없지 않을까라는 점이다. --- p.141~142

‘자격’에 관해 묻는 일은 개인이 ‘능력’에 의해 선별된다는 말이다. 예컨대 입학시험이나 입사시험이나 승진시험이라는 방식으로 선별이란 선택받는 자와 선택받지 못하는 자로 나뉜다는 말이다. 선택받지 못한다는 것은 “당신은 우리 집단에 필요 없다”는 선고를 받는다는 것이다. 즉 당신의 존재는 우리에게 불필요하다고 존재의 의미를 부정당하는 일이다. ‘근대’라는 사회적 프로젝트의 연장선상에서 사람들은 이렇게 누구나 존재의 의미를 묻는 물음 앞에 내던져졌다. 다행스럽게 선택받은 사람들도 다음에는 선택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근대’는 그런 점에서 사람들이 항상적으로 존재를 부정당할 가능성에 놓여 있는 사회라고 하겠다. (중략)
개인의 자유라는 근거를 개인 존재의 ‘자기소유’라는 사태를 통해 마련하고자 했던 존 로크의 사상적 연장선 위에는 이러한 쓸쓸한 광경이 펼쳐져 있다. --- p.148~149

근대를 대표하는 또다른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는 개인의 자유에 대한 근거를 존재의 ‘자율’에서 찾고자 했다. 바꾸어 말하면 자기가 무슨 일을 할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율적’ 주체로서 자유로운 개인을 규정하려고 했다. ‘자율’이란 타자로부터 강제받지 않고 내부적인 감정이나 충동에도 갇히지 않은 채, 자유롭게 자신을 통제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자율의 전제를 이루는 것이 바로 자신의 존재는 자기 것이라는 사상이다. 이리하여 사람은 ‘소유’라는 시선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게 되었다. 다른 말로 바꾸면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타자에게 빚지고 있다는 사고방식이 들어설 자리가 없어졌다는 말이다. 윤리학자 사와모토 다카시는 이 점을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소유(owe)와 책무를 진다, 은혜를 입다(owe), 당위(ought) 사이에 있는 어원적인 연결성”에 착안하여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신체와 능력의 서유(own)가 사회에 대한 책무관계(owe)로부터 절단되는 지점에 근대에 특이한 ‘자기소유권’이라는 주장이 겨우 성립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충분히 경정할 만한 지적이라고 본다. --- p.149~150

지금 내가 여기에 있다는 존재의 무게는 무엇보다 싫다고 도중에 포기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타자와의 관계,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 없는 관계, 또는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관계 속에서 생겨날 것이다. 타자의 간섭, 타자에 대한 의존은 대부분 거북스럽게 느껴지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곧바로 ‘부자유’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니, 그렇기는커녕 타자와 (보이는 또는 보이지 않는) 협동을 하지 않고서는 사회 안에서 하루도 살아갈 수 없고, 먹을 것 하나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타자의 존재는 확실히 내 ‘자유’를 속박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자유’를 보장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 의존은 확실은 부자유스럽다. 그러나 그렇다고 타자로부터 ‘독립’해 있다는 측면만으로 ‘자유’를 규정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 중간에 타자와의 상호 의존이 있다. ‘자율적’ 주체로서 ‘자유’를 생각할 때는 이런 측면의 ‘자유’가 빠져 있다. 자기의식 속에서 자기를 형성해가는 ‘자유’는 자기의식이라는 폐쇄회로 안에서는 쳇바퀴를 굴릴 뿐이며, 상호 의존이라는 관계 속에서 솟아오른다. --- p.168~169

우리는 무게를 상실한 자신에게 내 아이덴티티는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나의’ 연속성, 존재로서의 연속성에 매달린다. 그러나 연속성은 자신의 소유에 속한 과거에 자신이 덧붙여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 자유는 자신과는 다른 존재, 즉 타자와의 우연한 조우에 의해 주어진 것, 이른바 타자가 나에게 선물해준 것이다. 하지만 내 존재도 타자에게 자유를 선물할 가능성이 있다. ‘자기 자유의 옹호’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자유옹호’로 열려가는 일도 그러한 조우 속에서 생겨날 것이다. (중략)
그러한 interdependence 안의 자유는 interdependence 자체가 이 사회에서 아주 복잡한 시스템으로 익명적으로, 이른바 오토매틱하게 구동되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자유를 열어젖힐 틈을 찾아내기란 아직 요원하기 짝이 없다. 그 도상에 있는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지금 자신을 상처 내고 신체를 속박함으로써 자유로워진다는 정반대의 방법을 취하는 지점까지 내몰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 p.170~171

자신의 생활을 결정짓는 요소에 대해 단절감을 품으면서 사람들은 당사자가 되지 못한 채 방관자 위치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중략) 이러한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사라져가는 ‘중간세계’를 회복해야 한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원리, 이제까지와는 다른 네트워크에 의해, 사회적으로 강요받는 ‘자기 책임’이나 ‘자립’은 결코 ‘독립’(즉 비의존), 요컨대 중간세계에 파고드는 깊숙한 균열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각자에게 ‘서로 힘이 되어주는’(즉 상호의존) 네트워크를 항상 구동시킬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현대의 ‘공동 구빈(救貧)’ 시스템이며, 대다수 사람들이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문제다. --- p.183~184

공공 공간, 즉 ‘시민’이 공간에서는 행동 규준을 ‘대화’로부터 이끌어내는데, 이는 공동의 강제가 사람들의 내면을 규정하는 ‘내적인 제도’로 이미 기능하지 않는다는 상황과 불가분하게 이어져 있다. 다른 ‘시민’, 그러니까 차마 겉으로 나오지 않는 목소리에도 충분히 귀를 기울이는 가운데, 또한 어디까지나 ‘이성적’인 커뮤니케이션 과정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가운데, 그것은 이른바 ‘타협점’으로 등장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민’ 사이의 대화는 정치에서 다수결의 원리와 같이 일정한 타자를 잘라버리지 않는다. 그것은 마지막까지 ‘자유’의 다양성과 ‘타자의 자유 옹호’를 꽉 붙들고 있다. 이러한 대응은 끝없이 계속된다. 거기에 마침표를 찍는다면 결국 ‘윤리’라는 이름을 내건 사람들의 행동 규분은 필시 의사(疑似)법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마침표 찍기를 계속 거부할 때 비로소 ‘윤리’는 더욱 두툼한 것, 속 깊은 것이 될 가능성이 있다. --- p.190~191

사람은 한 사람 한 사람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다. 그 때문에 만약 개성의 발현에 근원이 되는 것을 그 사람의 ‘내부’에 가상적으로 상정하고, 우리는 그것을 알아차릴 수 없다고 생각하다면, 다시 말해 나의 해석 도식으로 번역하지 않으면 접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타자를 향한 ‘공감’이란 자타의 상호 격리(아파르트헤이트)가 될 따름이다. 타자성의 존중이라는 논의에는 이런 함정이 숨어 있다. 그것은 ‘자기에 대한 타자의 초월성’을 ‘타자에 대한 자기의 초월성’으로 재차 전도시켜버리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 p.218

인격은 진정으로 늘 같은 것이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타자들이 기대하는 동일한 것으로 늘 ‘통합’되어야 하는 것일까? 확실히 우리 사회의 법적 질서는 그것을 요구한다. 그것이 없으면 대체로 질서의 근간을 이루는 ‘귀책’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사회는 와해되어버린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나’로 통합된 인격은 어디까지나 그때마다 통합되고 있는 것이며, 원래 그런 인격으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다른 사람과 쉼 없이 만난다는 것이다. 그때마다 ‘내’ 존재는 터지고 기워지는 일을 반복하며 그때마다 다방향으로 일탈하는데, 그것을 미세하게 수정해가는 식으로 끊임없이 재편되고 있다. 다시 깁고 짜는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아 때로는 튕겨나가버리거나 와해되어버릴 때도 있다. 어찌 되었든 ‘인격의 통일’, 즉 정상태와 비정상태가 섞여 있는 ‘다중인격’이 있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정상/비정상을 측정하는 부동의 규준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인격은 항상 편차를 날고 재조직하는 부단한 과정 안에 놓여 있다. 그런 뜻에서 인격은 ‘통일’태로서 닫혀 있지 않다. 인격은 언제나 몇 겹의 톱니바퀴를 내장하고 있는데, 그것들에 의해 찢겨나가는 동시에 ‘자아’라는 각인조차 분명하지 않은 여러 변두리나 울타리 바깥으로 녹아든다. 그럼에도 인격이 동일한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타자들 사이에서, 다양한 타자로부터 기대나 구속을 받으면서, 때로는 그것에 응수하기 위해 위장하면서, 때로는 그것에 노련하게 대응하면서, 살아남아 스스로의 존재를 조종해가는 ‘자기(自己)’의 정치가 거기에 집요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 p.218~219

‘우리’의 보통이란 과연 무엇일까? 거칠게 말하면, 타자와 동일한 세계 해석의 규칙을 고유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타자와 동일한 해석의 그물망 속에 머무름으로써 ‘보통’을 손에 넣는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여우에게 홀린 것 같은 정신착란 상태와 같다. 한마디로 세계에 대해 어떤 특정한 해석에 사로잡혔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것에 깊이 사로잡히면 사로잡힐수록 그것이 특정한 해석이라는 것을 잊고, 그것을 통해 보이는 것이 세계의 실재라고 믿어버린다.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다 떨쳐버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계는 점점 더 딱딱한 것이 되어간다.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것이라는 의미에서도, 융통성이 없는 경직된 것이라는 의미에서도. --- p.237

메를로퐁티는 『시뉴』라는 저작에서 ‘민족학적 경험’에 의탁하여 보편적인 것으로 향하는 또하나의 길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람들이 객관적인 방법에 의해 언젠가 얻을 수 있으리라 믿고 있는 ‘가장 최고에 오르는 보편’이 아니라 “끊임없이 타자에 의해 자기를 음미하고 자기에 의해 타자를 음미함으로써 손에 넣는 측면적 보편”을 지향해야 할 때라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것을 이방의 것처럼 보고, 우리에게 이방의 것을 우리 것처럼 보는 것을 배우는” 시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중략) 다른 것을 다른 것으로 그대로 파악하는 것은 어렵다. 인간의 동물성을 생각할 때에도 동물성을 ‘우리’에게 이해 가능한 지평으로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훨씬 신경 쓰는’ 경험을 되풀이하는 것이 우선은 필요할 것이다. 이러한 경험을 간과했기에 인간은 산업에 의한 동물 학살을 넘어 다른 인간을 강제 수용하는 기술을 고도화하고, 결국에는 인간 자신의 대량 살육으로 나아간 것이리라. --- p.252

탄생과 병과 죽음은 인간이 유한하고 무력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사건이다. 마찬가지로 조리나 배설물 처리 작업도 자신이 바로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행위다. 조리라는 행위는 배설물 처리와 나란히 인간이 생물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얼마 안 되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건, 그런 행위가 ‘전후(戰後)’ 사회에서 점차 눈에 보이지 않게 되어갔다.
사람은 자기가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다른 생명을 파괴하고 있다는 것, 그때 다른 생명은 혼신의 힘을 짜내 저항하고 있다는 것, 사람은 생존을 위해 하나의 작업을 함께 하면서 서로 돕는다는 것, 자기라는 존재가 부정할 수 없는 물질체이며, 부서지면 소멸도 한다는 것…… 그런 신체적인 체험이 모조리 삭제된다면, 우리의 현실 감각 자체도 확실하게 뿌리째 변용될 것이다. --- p.256~257

죽은 자와 맺는 관계는 ‘누구’도 아닌 물질적인 시체와 맺는 관계가 아니다. (중략) 인류는 사체에 대해 ‘일종의 독특한 배려’를 드러내왔는데, “신체를 단순히 물건인 시체에 등치시켜 유기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신체에 대해 ‘죽은 자’라는 인칭적 카테고리를 적용하여 매장이라는 의례적 행위의 대상”으로 삼아왔다. 다시 말해 현재 우리가 의심하기를 잊고 있는 생체/사체, 즉 효용/폐물의 이분법이 아니라 산 자/죽은 자/시체라는 삼분법을 채용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죽음이야말로 ‘죽은 자’를 탄생시키는 것이다. (중략) 죽음의 상징성이 죽음을 바라보는 현대적 시선 속에서 점점 지워지고 있다. 또는 중화되어 왔다. 현대적 시선에 감추어져 있는 것은 ‘삶은 자연적이고 죽음은 반자연적’이라는 사상이다. --- p.중략)
그러나 시체가 타물(他物)인 데 대해 죽은 자는 타자(他者)다. 그리고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는 ‘응답’이라는 계기가 있다. 그렇다. 인칭적으로 중립적인 물음, 즉 ‘누구’도 아닌 비인칭적인 물음이 아니라 특정한 ‘누군가’로서 내가 특정한 타자에게 질문을 던지는 ‘문안(問安)’이 있다. (중략) 문안이라는 안부의 물음 안에는 안부를 묻는 자와 듣는 자 사이에 (안부라는) 구체적 내용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때? 잘 지내?” 하고 묻는 자와 묻고 있는 안부가 일체화되어 있다. 누구라는 죽은 자의 존재적 특이성은 그렇게 문안을 묻는 산 자의 특이한 시선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 p.260~261

마을공동체가 거대한 익명의 시스템으로 바뀐 현대사회에서는 따로따로 발생하는 개인 구성원의 죽음도 시스템 안에서 사소하게 이루어지는 익명의 교체로서만 현상(現象)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개별적인 항은 시스템 외부에 스스로 특이한 존재임을 확인시킬 수밖에 없다. 사람의 존재적 개성은 그러한 것이리라. 말하자면 그것은 함수의 임의 변수 같은 것이다. 따라서 자기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존재의 과잉 형태로 공동체 바깥으로 나간 곳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 시스템 안의 미묘한 차이의 확인만으로는 ‘이 사람’이라는 특이한 존재는 애초부터 버티지 못한다. 그런데 시스템 ‘밖’에는 자기 존재의 근거라 할 것이 없다. 이미 살펴본 바대로 ‘나’는 ‘타자의 타자’로서 언제나 내 존재를 수신인으로 삼는 사람, 요컨대 쌍을 이루는 항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관계를 맺는 두 항은 각각 ‘나’로서 탄생할 때 (특이한 존재로서는) 이미 죽어있다. ‘나’에게야말로 공동성의 결정적인 각인이 새겨져 있다. 따라서 사람은 끊임없이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 존재의 꼴을 바로잡고 타자에게 비추어 상이한 모습에 신경을 소모하지 않고서는 못 배긴다. 사적 소유에 대한 끝없는 바람도 물건의 서유자로서, 다시 말해 자기 뜻대로 처치할 수 있는 것을 소유하는 ‘주’체로서, 타자와의 관계를 절단한 곳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다는 것인데, 그 자체가 불가능한 꿈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물건을 소유하는 자라는 자신의 존재는 자신의 죽음이 얼마나 가벼운 것인지 내심으로는 알아차리고 있다. ‘나’라는 탄생과 죽음은 ‘쓰고 나서 버리는’ 상품과 마찬가지로 가볍다는 것을 말이다. 예전의 가난한 생활에서는 공동성에서 이탈하는 것이라는 것이 죽음을 의미했지만, 오늘날에는 거꾸로 공동성 ‘바깥’ 이외에는 자기가 존재할 장소가 없는데도, 실제로는 공동성이라는 최후의 각인에 매달리지 않으면 죽어버릴 것처럼 다시금 한바퀴 돌아와 공동성으로 회귀한다. 여기에서도 공동성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다만 이번에는 구성원 사이의 강한 의존 때문이 아니라 시스템의 차이 구조안으로 더욱 미세하고 깊이 편입됨으로써 공동성으로 회귀한다.
--- p.271~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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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범위 : 박스 포장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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