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에게는 첫째 부인 한씨 소생인 여섯 아들과 둘째 부인 강씨 소생인 두 아들이 있었다. 한씨 부인 소생은 방우, 방과, 방의, 방간, 방원, 방연이었고, 강씨 부인 소생은 방번, 방석이었다. “누구를 세자로 책봉하는 것이 좋은지 의견을 말해보도록 하시오.” 따진다면 한씨 부인 소생인 방우는 일찍 세상을 떴기 때문에 제2 왕자인 방과가 세자 자리에 올라야 했다. 배극렴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장자(맏이)를 세자로 정해야 하겠지만 지금은 국가 창업의 비상시이므로 개국에 공이 많은 제5 왕자 방원을 세자로 정하는 것이 옳습니다.” 배극렴의 발언은 계비 강씨를 자극시키기에 충분했다. ---‘말 위에서 다스리는 나라’ 중에서
세종이 왕위에 오른 이듬해 5월, 중대한 정보가 날아왔다. “왜선 39척이 침입하여 병선을 불태우고 약탈하는 사건이 터졌습니다!” 아직 군사 지휘권을 쥐고 있던 태종은 세종과 중신들을 모아놓고 대책을 의논했다. 그런데 세종은 그 자리에서 전혀 엉뚱한 말을 했다. “바다에서 전투를 포기하고, 육지에서의 전투만 준비하는 것이 어떨까요?” 그 말에 병조참의 박안신이 말했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인 데다 일본과 가까이 있기 때문에 해전을 포기한다면 해안 백성의 생명과 재산은 물론 국가 안보도 심각한 사태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태종이 세종을 막았다. “군사에 관한 일은 내가 친히 처결하겠다.”---‘태종의 대마도 정벌’ 중에서
“우리의 말과 소리를 자유롭게 적을 수 있는 우리만의 글이 필요하다. 우리글을 만들어 우리의 말을 마음껏 적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모든 나라가 각지 자기 나라의 글자를 만들어서 자기 나라의 말을 기록하는데 유독 우리에게만 그것이 없다.” 세종의 그런 생각은 곧 훈민정음의 창제로 이어졌다. 만약 이두가 일반 백성의 의사를 제대로 전달하여 불편함이 없었다면 훈민정음을 창제되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