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낳은 세계적 석학(碩學)으로, 흔히 ‘세계의 지성’,‘자유사상가’등으로 대변된다. 중국 복건성에서 가난한 목사 집안 출신으로 태어나 상하이 성 요한대학(聖約翰大學) 졸업 후 미국 하버드 대학과 독일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언어학을 전공했다.
그는 40세 때 쓴 자서전에서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표명했다. “두 다리로는 동서(東西)의 문화를 밟고, 한 마음으로 우주의 문장을 평(評)한다.” 과연 그는 동서양의 문화를 하나의 도가니에 용해시켜 독자적(獨自的)인 세계를 구축 했으며, 그 안에서 생겨난 사상과 문학을 세계를 향해 열정적으로 쏟아낸 대인(大人)이었다. 임어당 사상의 중추를 이루는 것을 크게 분류하면, ‘자유사상’,‘자연에 대한 애정’,‘인간에 대한 애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동양을 대표하는 유머리스트(humorist)이지만, 그의 유머는 단순한 익살이나 해학에 그치지 않고, 항상 인간애를 내포한다. “행위는 공자를 숭상하고, 사상은 노장(老壯)에 근본을 둔다.” “문장은 유머러스해야 하지만, 그 사람됨은 반드시 진실해야 한다.” 이것이 그가 평생 동안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았던 말이다.
먹을 것과 기질 사이에는 자연의 맥락이 있어 상상 이상의 밀접한 관계가 있다. 초식동물은 모두가 그 성질이 평화롭게 돼 있다. 양 ? 말 ? 소 ? 코끼리 ? 참새 등등. 그런데 육식동물은 모두가 싸움꾼이다. 이리 ? 사자 ? 범 ? 독수리 등이 그것이다. 인간이 만일 초식동물이었다면 성질이 좀 더 부드러웠을 것이 틀림없다. 자연은 다툴 필요가 없는 데에 호전적 기질을 낳지는 않는다. 수탉은 아직도 싸우는데 그것은 먹이 때문이 아니라 암탉 때문에 싸우는 것이다. 그야 인간사회의 남성 사이에도 아직은 다소 이런 종류의 싸움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렇다 해도 오늘날 유럽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수출용 통조림을 둘러싼 투쟁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나는 원숭이가 원숭이를 먹는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지만, 사람이 서로 잡아먹는다는 것은 알고 있다. 인류학은 모든 증거를 열거하여 식인 풍습이 제법 널리 행하여지고 있었음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그들은 우리 육식류의 조상이었다. 그러니 오늘날 인간이 아직도 갖가지 의미에서 서로 잡아먹고 있다는 것이 뭐가 이상하겠는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 ? 국가적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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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의 입장에서 서서 생각하면, 인간은 태어났을 때는 모두 갓난애로서 엄마의 젖을 빨고, 결혼하여 또 아이를 낳는 것이라는 사실을 회피할 것까지는 없다. 누구든지 다 여자의 배에서 나와 대개의 남자는 평생을 통해 다 부인과 같이 살고 또 자녀의 부친이며 모든 여자도 역시 여자의 배에서 나와 대개는 평생을 남자와 살고 또 자녀를 낳는 것이다. 자기 씨를 영속시키기 위한 씨앗을 만들기를 거부하는 나무나 꽃이 있듯이 인간 중에도 부모 되기를 거부하는 자가 있는데 그렇다고 해도 어떤 나무도 씨앗으로부터 생장하기를 거부하지 못하듯이 누구도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을 거부할 수는 없다. 이리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기본적 사실에 도달하는 것이다. 즉 인생의 가장 원시적 관계는 남녀와 그 자녀 사이의 관계이며 어떤 인생철학이라 할지라도 이런 본질적 관계를 문제로 하지 않는 한 철학으로서 만족하다고는 할 수 없고, 심지어 철학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남녀 간의 관계만으로는 충분하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은 아이를 낳는 것에 귀착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완전 한 것이다. 어떤 문명도 남녀로부터 아이를 갖는 권리를 뺏는 것 허용치 않는다. 이것은 현재 아주 진지한 문제이다. 결혼을 좋아하지 않는 남녀가 지금도 상당히 많고, 또 결혼하더라도 어떤 이유로든 아이를 낳는 걸 피하는 자가 많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 이유가 어디 있든 간에 남녀가 아이 없이 이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자기에 대한 저지를 수 있는 최대의 죄악이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