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한 마디로 어떻게 하면 ‘의사다운 의사’를 양성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학교육의 근본적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해 주고 있는 책입니다.
원서(原書) 『Teaching Medical Professionalism』은 북미 지역에서 가장 활발한 의학교육 연구기관 중 하나인 캐나다 몬트리올 맥길대학교(McGill University) 의학교육센터(Center for Medical Education)의 리처드 크루이스(Richard L. Cruess), 실비아 크루이스(Sylvia R. Cruess) 그리고 이본 스타인너트(Yvonne Steinert) 교수가 2008년 10월에 공동으로 편집, 발간한 책입니다. 의과대학 학부교육, 졸업 후 교육, 그리고 평생교육으로 이어지는 전체 의사 양성과정에서의 ‘의학 전문직업성’ 교육계획과 평가, 그리고 교수개발 내용 등을 정리한 이 책은 미국과 캐나다의 의학교육 전문가 25명이 필진으로 참여함으로써 사실상 북미지역 모든 의과대학에서 이 분야 교육 실태를 잘 보여 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1994년부터 12년간이나 미국의과대학협회(AAMC) 회장을 역임하면서 선진 미국 의학교육의 틀을 마련하고 현재 이 협회 명예회장과 조지워싱턴대학교 의과대학 조단 코헨(Jordan J. Cohen) 교수와 같은 저명한 의학교육 전문가들이 대거 필진으로 참여함으로써 이 책 내용의 객관성과 보편적 가치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미 이 책을 원서로 접한 의학교육자들이 적지 않지만 다소 늦게나마 이번에 한글 번역판이 나오게 되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읽어 볼 수 있게 된 것은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실제로 ‘의학 전문직업성’이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의료를 온정주의적 관점에서 하나의 시혜(施惠)로 여겨 온 20세기 중반까지도 어느 나라에서나 의학 전문직업성은 그리 중요한 주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발달과 함께 질병을 발생시키는 세균이 발견되고 이를 죽이는 항생제가 개발된 이후 의학이 ‘제왕적 과학(imperial science)’으로 그 위세를 떨치게 되었고, 그런 힘을 행사하는 의사는 환자들에게 ‘갑(甲)’의 위치에서 점차 그 권력을 남용하는 사례가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감염성 질환에 대한 의학의 기적적인 치료 효과는 의사로 하여금 환자의 의견을 무시하고, 그들의 사회 경제적 위치에 따라 환자를 차별 대우함으로써 사회는 이런 의사들을 거만함과 탐욕적인 인물로, 그리고 성실하지 못한 직업인으로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의학의 과학주의와 이에 편승한 의료의 탈 인간화(dehumanization) 현상은 감염성 질환이 차차 정복되고 난치성 만성질환이 대세를 이루는 최근까지도 계속되고 있으며, 따라서 의사와 환자들 사이에는 긴장감이 증가하고 상호 신뢰성이 떨어지는 상태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의학 전문직업성’은 이런 의학과 의료 현실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의학이 단지 자연과학적 지식과 기술로만 이루어진 학문이 아니라는 인식이 의학 전문직업성을 필요로 하게 된 것입니다. 즉, 의사는 치료자(healer)인 동시에 전문 직업인(professional)이기 때문에, 의사는 환자들의 질병에 대한 지식과 이를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치료하는 자율적 권한을 행사하는 동시에, 사회에 대해서는 전문직으로서의 능력(competence)과 성실성(integrity), 그리고 이타적 서비스(altruistic service) 정신을 보여주도록 요청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의학 전문직업성의 특성은 최근까지도 대학이나 병원 내 몇 사람의 역할모델(role model)들에 의해서 겨우 유지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이번에 번역 출판된 『의학 전문직업성교육』은, 이런 의학의 전문직업성이 이제 더 이상 몇 사람의 역할모델에 의해서가 아니라 여러 단계의 의학교육 기관, 즉 의과대학과 전공의 수련 병원들, 그리고 주로 개원의를 위한 평생교육 주관 단체들이 좀 더 체계적이고 적극적인 ‘교육과 훈련’ 계획을 마련하고 이를 실천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의학 전문직업성이 포함하고 있는 덕목들은 무엇보다 의사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해 준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 주제입니다.
바쁜 시간을 할애하여 좋은 책을 번역해 주신 세 분 번역자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와 축하를 드리며, 의사들을 양성하는 의학교육 관계자들은 물론, 학생과 전공의들, 그리고 지역사회 현장에서 직접 환자들을 진료하는 모든 의사들의 일독을 권해드리는 바입니다.
맹광호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명예교수, 예방의학)
지난 세기 의학교육에서 나타난 중요한 변화 중의 하나는 의학 전문직업성(medical professionalism)에 대한 교육이다. 1970년대 말부터 북미를 중심으로 시작된 과학 중심적인 전통적 의학교육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와 함께 의학교육에서 생명윤리, 의사소통술을 포함하는 환자와 의사의 관계 등 보다 인간중심적인 의학교육의 강조와 자기주도적인 교육방법론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어서 1990년대 중반부터 영어권을 중심으로 전문직업성에 대한 재조명과 의사 양성 과정에서 전문직업성에 대한 중요성의 인식과 이에 대한 교육이 급속하게 번져나갔다.
사실 우리나라에 전문직업성이란 번역어에 대한 이해는 쉽지 않다. 가깝게는 의술이 인술이라는 짧은 단어로 표현하는 예는 있었으나 현대 의사 전문직에서 실제로 인술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석되고 전개되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서양의학이 우리나라에 도입되었으나 서양의학의 배경이 되는 역사, 철학, 문화, 종교 등이 의과학과 함께 동시에 도입될 수 없었기에 의학 전문직업성이란 단어는 생소할 수 밖에 없었다. 의학 전문직업성의 이해가 절실한 시대적 상황에서 리처드 크루이스(Richard L. Cruess), 실비아 크루이스(Sylvia R. Cruess) 교수와 이본 스타인너트(Yvonne Steinert) 교수가 출간한 『의학 전문직업성교육(Teaching Medical Professionalism)』이라는 영문판 유명 도서를 드디어 우리나라에서도 한글로 마주하는 좋은 기회가 생기게 되었다.
이것은 놀랍게도 대학이 아닌 의료윤리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높은 식견을 가진 세 분의 개원의들이 연합하여 각고의 노력으로 출간한 한글 번역본 덕택이다. 엮은이들은 “의료윤리연구회”를 중심으로 의료현장에서 의사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의학 전문직업성에 대한 인식의 확산을 통하여 의학 전문직업성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선두주자로 노력하고 있다. 이 책은 의학 전문직업성에 대한 개념이 막연하였던 우리 의료계에 의학 전문직업성을 위한 교육에 훌륭한 지침서 역할을 할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고 우리나라에서 좋은 의사양성을 위한 전주기의 의학교육에서 꼭 필요한 지침서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번역에 대한 고통과 고민을 인내하고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하는 번역작업에 힘써주신 세 분께 무엇보다도 심심한 감사와 존경의 뜻을 표하며 전문직이면 누구나 한번쯤 읽어야 할 번역서로 강력히 추천한다.
안덕선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세계의학교육연합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