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혼례 날이 되었다. 제법 큰 명절인 오월 단오를 보낸 지 보름 만에 치르는 혼사라 김현성 대감댁은 이만저만 바쁜 것이 아니었다.
유월에 태어난 금랑옹주가 한 살을 더 먹기 전에 빨리 시집보내고자 하는 왕의 의도에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한성국의 혼례는 친영례로 신부 집에서 혼례를 올린 하룻밤 뒤에 신랑 집으로 오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금랑의 경우 왕의 명에 따라 신랑 집인 병조판서의 사택에서 혼례를 치르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금랑은 남대란치마 위에 홍대란치마를 겹쳐 입고 삼회장저고리 위에 금박꽃무늬가 화려하게 분포된 초록원삼을 입었다. 초록원삼에는 쌍봉문의 흉배를 장식하여 옹주의 신분을 나타내었고, 머리는 어여머리를 하는 대신 간소화하여 큰 낭자머리 중앙에 족두리를 쓰고 앞뒤로 댕기를 길게 늘였다. 금랑은 고개를 숙인 채라 맞은편에 서 있는 새신랑의 얼굴조차도 보지 못한 상태였다. 그저 얼핏 푸른 단령에 검정 목화만이 보일 뿐이었다.
주위사람들의 수군거림으로는 훤칠하고 잘생기어 나이든 여인네의 마음마저도 두근거리게 한다니, 더 궁금해지는 그녀였다. 하나 당돌하게 눈을 들어 마주할 수가 없어서 궁금증을 참고 있는 중이었다. 게다가 하루 종일 이어지는 혼례 절차에 교배례를 시작한 지금은, 느린 진행과 절을 하기 위해 앉았다 일어나기를 네 번이나 반복하다 보니 안 좋은 다리도 점점 아파오고 있었다.
교배례가 끝나자 술을 마시는 합근례가 이루어졌다.
생전 처음 술을 마시게 된 금랑은 기분이 이상해지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돌아온 잔은 세 번이라 어찔한 것이 몸에 기운이 없어졌다. 한 모금씩만 마셔도 된다는 것을 모른 채 다 마셔버린 것이 문제였다.
모든 절차가 끝나고 금랑은 수모의 부축을 받아 별당침방에 앉아 신랑이 들기를 기다렸다. 길고도 지겨운 시간을 보내는 중인데다 다리는 저려오고 겹겹이 입은 옷은 무겁고도 더웠다. 게다가 아까 마신 술 때문인지 자꾸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를 어찌할까! 참고 참아보았지만 내려오는 눈꺼풀을 참기가 힘들었다. 조금만 눈을 붙였으면 소원이 없겠는데…….
합궁 때문에 중궁전 지밀상궁으로부터 특별 교육을 받기까지 했던 그녀였다. 며칠 동안 합궁의 부담 때문에 잠을 설쳤던 것이 지금에서야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다리를 꼬집어보고 입술을 꽉 깨물어보았지만 효과가 없었다.
한편 김시원은 사랑에서 밤이 깊어지길 기다렸다가 신방으로 향하였다. 그의 가슴께밖에 오지 않는 작은 몸집의 금랑옹주는 하루 종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바람에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였다.
신부의 얼굴도 모르고 혼례를 치렀으니, 그 모습이 상당히 궁금했던 시원이었다. 바보옹주에다 자신이 자처한 혼인이라 이런 떨림이 오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는데, 합궁을 남겨두고 있어서인지 가슴이 두근두근 안절부절못하였다.
그런데 과연 모자란다는 금랑옹주와 합궁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 또한 의문이었다.
별당에 들어선 시원은 방문을 열고 들어가 침방으로 이어지는 중문을 열었다. 두 개의 화촉이 은은하게 방안을 밝히고, 원앙금침 옆에 고개를 숙인 채 다소곳이 앉아 있는 금랑이 눈에 들어왔다.
‘쯧쯧, 아직도 고개를 숙이고 있단 말인가!’
장지문을 닫고 금랑의 앞으로 다가가 앉으려는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졸고 있던 것이었다.
“쯧쯧.”
시원은 기가 막혀 혀를 차면서 주안상에 놓인 술을 따라 마셨다.
아무리 뭣 모르는 바보라지만 첫날밤의 긴장감조차 없이 졸고 있다니, 앞길이 막막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다 고개를 까딱이는 금랑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방안이 그리 밝은 편은 아닌데다 연지곤지가 찍혀 있어서 얼굴을 제대로 확인할 길이 없었다.
그의 시선 때문인지, 아님 다른 기척을 느꼈는지 금랑이 눈을 뻔쩍 뜨더니, 동그란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고개를 숙였다.
“제…… 제가 그만.”
금랑은 자기도 모르게 졸아버리고 만 것이다. 잠에서 깨어 눈앞에 사내가 앉아 있으니 소스라치게 놀란 것은 물론이요. 제정신이 돌아와 자신이 졸았다는 것을 깨닫자 민망함에 어쩔 줄을 몰라 또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민망하고 미안하여 얼굴을 바라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옹주마마께서도 한잔 드시겠습니까?”
“아…… 아닙니다. 아…… 아까 마신 술 때문에 아직도 머…… 머리가 지끈거리옵니다.”
“아!”
말을 더듬기는 하는데, 대답은 곧잘 하는 걸 보면 그리 바보같이 느껴지진 않았다.
“오늘 혼례를 치렀으니 옹주마마와 저는 백년가약을 맺은 겁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서…… 서방님, 옹주마마라니요. 마…… 말씀을 놓아주십시삿.”
“그럼…… 부인이라 부르겠습니다. 부인은 지금 우리가 한방에 있는 이유를 아십니까?”
“네에.”
“그럼, 제가 손을 대도 놀라지 않으시겠습니까?”
금랑이 고개를 끄떡였다. 금랑의 소리 없는 대답에 김시원이 술상을 옆으로 치우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시원은 배운 대로 족두리를 내리고 도투락댕기와 앞 댕기를 풀어 머리를 내려주었다. 그리고 먼저 원삼을 벗겨 주었다. 안 그래도 더웠던 금랑은 그의 손길이 두렵고 수줍기도 했으나 한편으론 살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삼회장저고리에 치마까지 벗겨지자 이제야 지밀상궁이 말했던 일이 벌어지는구나 싶은 것이, 긴장감이 몰려들었다.
그녀가 수줍어한다 생각했던 김시원이 화촉을 하나 꺼버리는 바람에, 금랑은 그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 상태였다.
금랑의 속치마를 남겨둔 채 옷을 벗은 시원이 잠시 후 그녀를 원앙금침에 뉘였다. 그리고 나머지 불마저 꺼버리자 장지문을 뚫고 들어오는 은은한 달빛만이 깜깜한 방안을 그윽하게 밝힐 뿐이었다.
순간 김시원은 그녀에게서 나는 향긋한 향기와 달빛에 비췬 하얀 살결에 욕정이 밀려들어 당황하였다.
스물다섯이었으나 경험이 없는 것으로 친다면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친우들의 장난으로 기방에서 기녀를 안을 기회는 많았다. 그러나 첫 경험을 허무하게 보내고 싶지 않아 기녀에게 웃돈을 얹어주고 양해를 구하고 나왔던 그였다. 그리하여 친우들은 동정을 잃었다 생각하지만 그는 아직도 경험 없는 숫총각이었던 것이다. 혈기왕성한 남자이기에 욕정을 느끼는 것은 당연지사라도 그것을 꼭 성적으로 풀란 법은 없었다.
혼례 날을 잡은 뒤에도 친우들에게 기방으로 불려가 이런저런 기술과 방법을 들었던 그였다. 그런데 실전에 닥치자 그런 방법은 별 필요 없을 성싶었다.
백옥 같은 하얀 살결이 눈앞에 드러나니, 그곳에 저도 모르게 입을 맞추고 싶었던 것이다. 시원이 입술을 갖다 대자 놀란 금랑이 몸을 움츠렸다. 그가 가슴 가리개를 벗기기 위해 매듭을 풀려는데 자신의 옷자락을 꽉 쥔 그녀의 작은 손이 눈에 들어왔다. 게다가 사시나무 떨듯 떠는 금랑을 보자 차마 그대로 욕정만을 풀기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첫날밤이긴 하나 온전치 못한 여인을 제멋대로 안아버린다는 것이 상당히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시원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금랑의 입술에 살짝 입맞춤을 해주었다.
‘이리도 달다니.’
살짝 닿았던 금랑의 입술이 너무나 부드러워 입맞춤을 했던 시원은 오히려 당황하였다.
“겁이 나십니까? 오늘은…… 이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앞으로 시간이 많을 터이니 서로 준비가 되었을 때 그 때 합궁을 하기로 하지요. 어떻습니까?”
시원의 뜻밖의 배려를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 금랑은 그가 지금 은근한 소박을 놓은 것인지 아님 진심으로 기다리겠다는 말인지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안도가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서방님. 지…… 진심이십니까? 제…… 제가 너무 부족하여 죄송합니다. 그…… 그리고 배려에 감사합니다.”
“그럼 오늘은 많이 피곤한 것 같으니 이만 잠자리에 들기로 하지요. 보는 눈이 있으니 며칠간은 이 방에서 자겠습니다. 괜찮으시겠지요?”
“그…… 그럼요.”
시원이 그녀의 옆으로 눕더니 이불을 덮고 몸을 돌렸다.
금랑은 커다란 사내의 등을 바라보면서 살짝 손을 뻗어보다가 거두었다. 얼굴도 모르는 서방이었으나, 이리도 아량이 넓으니 마음이 놓이면서 미안하였다.
‘이렇게 괜찮은 분이 아바마마의 명 때문에 억지로 혼인을 하게 되었으니, 이를 어찌할꼬. 이분을 놓친 여인은 얼마나 억울할까. 또 죄를 짓고 말았구나. 차라리 능력 없는 이로 아무나 고를 것을.’
금랑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나와 소리죽여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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