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민족 설화와 분단에 관한 순수 희곡 작품에 주력해 온 그는 『바리공주』『종착역』『눈꽃』 등을 통해 우리나라 희곡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연 극작가라는 평가를 받는다. 아울러 『남태강곡』『우리 코를 뚫어다오』『나부상화』등의 작품으로 불교의 문학적 착화에 진력해 왔다. 산문으로 『이 길이 나의 마지막 길』『산문, 그 아름다운 이야기』등, 소설로는 『옥아』『이곳에 살기 위하여』등이 있다.
인도 불교에서의 선정사상은 불교수행 전반에 걸친 기본적 요소인데, 선정사상만을 취하여 그것을 중심으로 종파가 발생하고 발전된 것은 중국에서이다. 이 과정에서 최초의 순수한 디야나(명상)로서의 성격이 변질되어 인도와는 다른 중국적 색채가 농후한 새로운 의미의 선이라는 개념이 생겨나게 되었다. (5-6쪽)
(보리달마는) 현학적인 철학체계에 갇힌 그 시대의 불교에서 벗어나 본래의 청정한 자성에 눈떠 바로 성불하라는 설법을 평이한 구어로 말한 종교 운동가였다. 많은 민중들은 그의 사상에 열광했다. 8세기부터 9세기에 걸친 급격한 사회변혁 시대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새 불교의 이상을 달마에게 구하였다. 민중들은 논리적이고 교학적인 불교보다는 단순하고 직설적인 불교를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17-8쪽)
“누구냐?” “스님, 저 혜가입니다.” “들어오너라. 그런데 무슨 일이냐?” “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마음을 편안케 해 주십시오.” “편치 않은 마음을 가져오너라. 그럼 내가 너의 마음을 편안케 해 주겠다.” 혜가는 스승께 사실대로 말했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불안한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너의 마음을 이미 편안케 해 주었다.” 달마의 그 말은 혜가에게는 천둥이고, 번개였다. 혜가는 활짝 웃었다. 눈을 뜨면 항상 내가 있다는 착각에 빠져 불안했던 혜가는 달마의 이 안심법문을 통해 불생불멸의 진리를 깨달았던 것이다. 마침내 혜가는 붓다로부터 전해진 서천의 28대 달마의 법을 이어 받고 법의 증표로 부처님의 금란가사를 받아 달마를 초조로 하는 선종 2대 조사가 되었다. (47쪽)
중국 선불교 제2대 조사인 혜가의 뒤를 이은 것은 승찬이었다. 마흔이 넘도록 승찬은 문둥병으로 인해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몰골을 갖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무슨 죄를 지어 이런 병을 앓게 됐는지 알고 싶어 했다. 이 ‘알고 싶다’는 최초의 의문은 아주 중요한 철학적 행위였다. 사실 역사의 위대한 발견이나 획기적인 사상의 전환도 따지고 보면 이 ‘알고 싶다’는 물음에서 출발한다. 남들은 모두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에 대해 ‘나는 그것을 따져 알고 싶다’는 마음이야말로 깨우침의 시작이다. 천형과도 같은 문둥병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 수도 있었지만 승찬은 그렇지 않았다. ‘왜?’라는 의문을 가슴에 품었던 것이다. (5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