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만근은 또한 책에 나오는 예는 몰라도 염습과 산역같이 남이 꺼리는 일에는 누구보다 앞장을 섰고 동네사람들도 서슴없이 그에게 그런 일을 맡겼다. 똥구덩이를 파고 우리를 짓고 벽돌을 찍는 일 또한 황만근이 동네 사람 누구보다 많이 했다. 마을 길 풀 깎기, 도랑 청소, 공동우물 청소...... 용왕제에 쓸 돼지를 산 채로 묶어서 내다가 싫다고 요동질하는 돼지에게 때때옷을 입히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일에는 그가 최고의 전문가였다. 동네의 일, 남의 일, 궂은 일에는 언제나 그가 있었다. 그런 일에 대한 대가는 없거나(동네 일인 경우), 반값이거나(다른 사람의 농사일을 하는 경우), 제 값이면(경운기와 함께 하는 경우) 공치사가 따랐다.
"반근아. 니가 우리 동네 아이고 어데 인정 없는 대처 도시 같은 데 갔으마 진작 굶어 죽어도 죽었다. 암만 바보라도 고마워할 줄 알아야 사람이다. 아(아이)나 어른이나 너한테는 다 고마운 사람인께 상 찡그리지 말고 인사 잘하고 다니라. 아이?"
--- p. 224
한번 의심하는 마음이 생기자 점점 확신으로 변했다. 그렇게 좋은 섬이라면 올 여름 같은 혹서에 오죽 피서객이 많이 몰려들겠는가. 민박집이 호황을 맞아 일손이 달릴 게 뻔했다. 그러잖아도 공밥을 얻어먹을 동생이 아니었다. 오죽 바지런을 떨며 구석구석 쓸고 닦고, 엽엽하게 투숙객들 시중을 들 것인가 보지 않아도 눈에 선했다. 그 속 없는 것이 본업을 까맣게 잊고 팁 몇 푼 얻어 쓰는 재미에 팔려 배알이라도 내줄 듯이 해해거리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울화통이 치밀었다. 파출부란 제도가 있기 전 옛날, 요새 너도나도, 아무리 가난뱅이라도 밥만 안 굶으면 다 자가용 부리듯이 도시에선 집집마다 식모를 두고 살던 때가 있었다. 공단이 생기면서 그 흔한 식모가 귀해지기 시작하자 남의 집 식모를 빼돌리다가 탄로가 나서 친하던 이웃끼리 쌈박질이 나기도 했다. 나는 그런 일을 당했을 때처럼 그 민박집한테 맹렬한 적의를 느꼈다. 동생의 아들네로 전화를 걸어 섬의 민박집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동생의 이름을 대고 바꿔달랬더니 심부름을 나갔다고 했다. 그 집에서 부려먹고 있다는 내 추측은 틀림이 없었다. 그래도 그렇지 환갑 노인에게 심부름이라니, 설사 심부름을 나갔다 해도 잠깐 출타를 했다고 하면 듣기 좋을 것을, 하고 나는 민박집의 본데없음을 마음껏 경멸했다.
--- pp. 22~23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도 춥지 않은 남해의 섬, 노란 은행잎이 푸른 잔디 위로 지는 곳, 칠십에도 섹시한 어부가 방금 청정해역에서 낚아올린 분홍빛 도미를 자랑스럽게 들고 요리 잘하는 어여쁜 아내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오는 풍경이 있는 집.
--- p.39
어느 누구도 알아주지 아니하고 감탄하지 않는 삶이었지만 선생은 깊고 그윽한 경지를 이루었다. 보라. 남의 비웃음을 받으며 살면서도 비루하지 아니하고 홀로 할 바를 이루허 초지를 일관하니 이 어찌 하늘이 낸 사람이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이 어찌 하늘이 내고 땅이 일으켜 세운 사람이 아니랴.
--- p.235, 10-14
농담을 진담으로 받을 때의 당혹감이라니. 동생이 혼자 됐을 때만 해도 비록 꼴깍 넘어가기 직전이었지만 쉰자가 들어가는 나이였다. 그러나 이제는 환갑 진갑 다 받아먹은 뒤가 아닌가. 그 나이에 더군다나 섬에서 누구와 사랑에 빠질 수가 있단 말인가. 사랑도인지 사량도인지가 갑자기 근해의 파도 속에서 비너스가 요상하고 변덕스러운 화냥기를 바람에 실어 보내고 있는 것 같은 비현실적인 섬으로 변했다.
--- p.25
나의 우물이 다시 차고, 검고 축축한 옷을 입은, 키가 너무 커서 꾸부정한 밤의 아저씨가, 한낮, 우물 밑에 누워 있다가, 저물녘, 사철나무 밑으로 성큼 나와 앉아, 물레인지 풀무인지, 쓰윽쓰윽, 애들 장난하듯 돌려서, 멀고 가까운 데, 쓰윽쓰윽, 낮은 곳에서 높은 곳까지, 또 쓰윽쓰윽, 연기처럼, 먹물을 풀어 부드럽고 은근하게, 산의 원근도, 또 세상의 명암도, 쓰으윽, 가리는 걸 보고 싶습니다.
--- p.196-197
"해서 이름이 덕봉인갑다. 저 머시냐..... 깜깜절벽 속에서 가래떡 썰기 글씨 쓰기 시합을 한 모자 있었잖여. 옛날 옛적에. 아이고 입에서 뱅뱅 도는데 안 나오네."
"한석봉."
"맞어."
"하면 한석봉이 되어지고 축원하는 마음에서 덕봉이라는 이름을 민적에 올렸댜?"
"어떻든지 글자 한 자 상관의 재미가 참 괜찮소. 글씨까지 이렇게 쪽 고르고 봉께."
"설마 떡애기 때부터 그런 소원을 갖고 이름을 짓는 부모가 있을라. 더군다나 글 대서로 업을 삼는 이 댁 어른이 무엇이 아쉬워......"
두 여자의 찧고 까부는 말이 슬그머니 귀에 거슬렸던가, 마뜩찮은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고 있던 어머니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유식들도 하시오. 우리 집 냥반이 돌림자를 따라 부르기 좋게 그냥 지었을 뿐인데, 별소리 다 듣네."
--- pp. 327~328
"해서 이름이 덕봉인갑다. 저 머시냐..... 깜깜절벽 속에서 가래떡 썰기 글씨 쓰기 시합을 한 모자 있었잖여. 옛날 옛적에. 아이고 입에서 뱅뱅 도는데 안 나오네."
"한석봉."
"맞어."
"하면 한석봉이 되어지고 축원하는 마음에서 덕봉이라는 이름을 민적에 올렸댜?"
"어떻든지 글자 한 자 상관의 재미가 참 괜찮소. 글씨까지 이렇게 쪽 고르고 봉께."
"설마 떡애기 때부터 그런 소원을 갖고 이름을 짓는 부모가 있을라. 더군다나 글 대서로 업을 삼는 이 댁 어른이 무엇이 아쉬워......"
두 여자의 찧고 까부는 말이 슬그머니 귀에 거슬렸던가, 마뜩찮은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고 있던 어머니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유식들도 하시오. 우리 집 냥반이 돌림자를 따라 부르기 좋게 그냥 지었을 뿐인데, 별소리 다 듣네."
--- pp. 327~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