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서문
방제학은 중의학의 중요 기초학문 분야 중 하나다. 중의학 기초학문과 임상학문 사이에서 중요한 연결고리 또는 교량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이법방약(理法方藥) 체계 중에서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 방제학의 목적은 일정 분량의 상용방제에 대한 강의를 통해, 학생들이 방제를 분석하고 운용하며 나아가 임상에서 방제를 구성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며, 이후 학습할 임상 중의학 과정을 위한 초석을 닦는 것이다. 중의학 전공자들을 위한 주축 과목이라 할 수 있다.
수업 중에 이야기되는 방제의 가짓수는 매우 제한적이다. 제한된 강의 시간 속에서 어떻게 비슷한 부류의 처방들이 지니고 있는 공통점을 뽑아내고, 학생들이 방제의 구성 원리나 약물조합상 기교를 장악해 낼 수 있도록 할 것인가. 이는 방제학 교수로서 처음 교편을 잡을 때부터 줄곧 지니고 있던 문제의식이었다. 수년간 이어진 강의 기간 동안 나는 줄곧 복합 방제의 약물조합 규율이야말로 방제학 교육의 핵심이라 여기고 있었으며, 그중에 중의학 사유 원리의 특징을 융합시키고자 했다. 그 목적은 학생들이 제한된 방제의 학습 과정 속에서 비슷한 부류의 방제가 지닌 약물조합 규율을 장악하고, 해당 방제를 임상에서 응용할 수 있도록 하는 사유 능력을 강화하고 확장함으로써, 향후 임상에서 마주할 복잡하고 다양한 병증에 대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금번 방제학 강의원고는 국가중의약관리국 주도로 실시된 인터넷 강의(2003년)와 타이완의 장겅(長庚)대학 중의학과에서 수업(2004∼2008년)한 내용을 종합한 것으로 학생들에 의해 정리되어 완성되었다. 이 강의 원고의 특징은, 첫 번째 약물조합 기술을 어떻게 귀납할 것인지를 중시하고 있는 점, 두 번째 서로 다른 성질을 지닌 방제에 대한 설명을 강조하고 있는 점이다.
약물조합 기술을 어떻게 귀납할 것인지에 대한 강조는 나의 수년에 걸친 임상 의료 실천 및 교육 과정에서의 경험을 통해 갈무리되었다. 이러한 학술 관점은 동료 전문가들로부터 인정받았을 뿐 아니라 교육부 및 국가중의약관리국으로부터 중시되어 보통고등교육 “10.5” 국가급 계획교재 《방제학(方劑學)》에 처음으로 첨가되기에 이르렀다. 전통적으로 방제학 교재는 군신좌사(君臣佐使)를 대표로 하는 기본적인 방제구조에 대한 분석과 훈련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 여러 가지 효능을 지닌 단미(單味) 중약(中藥)들을 활용해 복합 방제를 구성할 때, 그 효능의 발현 방향을 어떻게 제어할 것인지에 대한 설명은 거의 공백 상태에 있었다. 단미 중약이 방제 중에서 그 효능을 발휘할 때, 그 방향을 제어할 수 있는 요소로는 약물조합, 용량, 포제, 전탕 및 복용 방법 그리고 제형 등이 있다. 그중 약물조합과 용량은 방제구성 기술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요소들로 중의방제학(中醫方劑學)의 특색과 영혼이 여기에 집중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독자들로 하여금 방제의 구성 원리와 약물조합 기술을 장악할 수 있도록 유도함으로써, 임상에서 약물을 처방할 수 있도록 하는 기본 능력을 제고시키고, 합리적으로 운용할 수 있도록 지도하는 것은 분명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서로 다른 특징을 지닌 방제 강의에 집중하고 있는데, 이는 역대로 소규모 생산 방식을 통해 수많은 방제들이 만들어져서 장기간에 걸친 임상 경험과 규범 정리 과정을 통해 어느 정도 객관적인 속성을 파악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장기간에 걸친 교육 연구와 임상 운용 경험을 기반으로, 나는 여러 방제들을 속성에 따라 기초방제(基礎方), 대표방제(代表方), 상용방제(常用方) 등으로 분류했으며, 학생들로 하여금 서로 다른 성질의 방제들을 서로 다른 방법을 활용해 학습하고 이해하며 그 규율을 장악해 낼 수 있도록 함으로써 학습 효과를 끌어올렸다.
이 원고 중에는 내가 이제껏 방제학을 연구하면서 깨달아온 심득心得이 담겨 있다. 모쪼록 독자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부족한 점과 잘못된 사항에 대해서는 언제든 질정을 환영한다.
역자 서문
…… 여러 개 약물로 구성된 방제는 임상 한의학의 가장 오랜 그리고 가장 중요한 치료 수단이다. 주지하다시피 하나의 방제 중에는 여러 가지 한의학이론이 집약되어 있다. 한의학이론은 오랜 시간을 지나오면서 축적된 역사적 산물인 만큼, 그 방제가 등장한 역사적 맥락, 그 방제를 만들어낸 의가의 의학이론, 해당 방제가 수록된 저작의 특징 등을 알지 못하면 개별 방제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최근 의학 저작에 담긴 의학적 원리와 그 역사적 맥락을 연구하는 원전학(原典學)과 의사학(醫史學)의 임상의학적 무용성을 주장하고, 현대적으로 구축된 임상의학적 근거에 입각한 약물 운용을 주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대두되고 있다. 그들의 주장도 일리는 있다. 다만 하나의 방제를 이해하고 운용하기 위해, 기존 한의학 개념어를 활용해 이론·병증분석·치료방법·방제·약물 등을 분석하는 이상, 원전학 및 의사학의 연구 범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 책은 중국 청두(成都)중의약대학에서 방제학을 강의하고 있는 노중의(老中醫)의 강의록이다. 어떤 한 증상을 치료할 수 있는 쓸모 있는 방제를 골라내기 위해 이 책을 펼쳐들었다면 다소 당황스러울 수 있다. 책의 저자이자 강의자인 덩종자(鄧中甲) 선생의 방제 설명은 방제 수록 의서, 해당 방제를 만든 의가의 의학이론, 개별 방제의 병리기전, 약물조합특징, 약물가감 등을 케케묵은 전통 의서 중에서 발췌한 내용과 자신의 임상 경험이 하나하나 쌓아가며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 생각해 보면 당연한 내용이기도 하다. 방제학은 임상 한의학으로 넘어가기 위한 기초 한의학의 최종 관문으로, 개별 방제 하나하나마다 갓 구워낸 벽돌과 같이 한의학 기초이론 전반이 압축되어 있다. 한의학 기초이론이란 것은 결국 이제껏 읽혀지던 수많은 과거 의서들의 내용 정리에 다름 아니었던가? 방제학은 사실 방제라는 벽돌을 하나하나 쌓아올려 만들어낸 전탑(塼塔)에 해당한다. 방제학 서적을 출판하고 싶다며 역자를 찾아온 출판사 사장의 설득 논리 역시 역자가 원전학 및 의사학을 전공한 방제학 연구자라는 것이었다.
번역 과정에 있어서는 무엇보다 한글 풀이에 역점을 두었다. 이와 같은 착안은 몇 년 전 신동원 교수님, 그리고 한의사 이기복, 전종욱 선생님과 함께 진행했던 조선 의안 저작 《역시만필(歷試漫筆)》의 번역 훈련 성과에 기인한다. 저자이자 강의자인 덩종자(鄧中甲) 노중의(老中醫)는 이미 중의학, 동아시아 전통의학의 용어를 자기 언어화해서 사용하고 있다. 역자 역시 한의학 전공자이기에 전공 용어를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데 비교적 익숙한 편이다. 그러나 역자는 독자가 학생임을 염두에 두고 최대한 한글로 풀이하고자 했다. 다만 일선에 있는 한의사와 일일이 풀어쓰는 번역어가 오히려 낯선 분들을 배려하여 한자어를 병기했다.
매끄럽게 표현하지 못한 부분도 존재한다. 동아시아 전통의학은 기본적으로 기일원론(氣一元論)을 전제하고 있다. 모든 동아시아 전통의학 용어에서 ‘기(氣)’는 대전제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자음(滋陰)이라는 단어의 경우 대개 ‘음기를 북돋다’라고 번역했지만, 온병학파 의가들이 창제한 방제 중에서는 ‘음액을 북돋다’라고 번역하기도 했다. ‘음’이라는 단어에 ‘기’라는 개념이 전제되고 있지만, 온병학파 의가들은 특별히 ‘음액’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자양(滋養), 자(滋), 양(養)과 같은 단어들은 뉘앙스간의 차이가 드러나도록 각각 ‘자양하다’, ‘북돋다’, ‘기르다’ 등으로 번역했다. 본문 제7장 보익제(補益劑) 중의 표현 그대로 “폐장, 위장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음기를 길러주고(養陰)라 이야기하지 음기를 북돋는다고(滋陰) 표현하지 않으며, 비교적 위중한 간장과 신장의 음기 허약(肝腎陰虛)의 경우 음기를 북돋는다(滋陰)는 표현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기존 한의서 독자들로서는 이와 같은 한글 풀이가 생경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동아시아 전통의학 용어들을 읽어낼 때는 짓누르고 있는 시간의 무게를 감당한 채 그 맥락 속에서 파악해야 하는 점, 의가들의 언어 습관까지도 고려해야 하는 점 등을 양해해 주기 바란다. 한편 이 저술은 저자의 방제학 강의를 그대로 타이핑한 일종의 강의 원고다. 구어체이기에 강의 현장의 생생함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정확하지 않은 인용 문장이나 정선되지 않은 단어 표현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어의 선택은 역자가 지니고 있는 현재의 학문적 수준을 반영한다.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것은 모두 역자의 이해 및 능력 부족이다. (후략)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