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고, 잡을 수 없는 별을 잡자”는 돈키호테의 꿈이 젊은이만 설레게 하는 것은 아니다. 불안하기만 한 은퇴와 나이 앞에서 당당하자. 늘 그랬듯 ‘은퇴 후의 삶’이라는 새로운 도전 앞에서, 새로운 여정 앞에서 돈키호테처럼 무모하게, 혹은 대담하게 뛰어가 보자.
달려라 로시난테! 너무 늦지 않게, 너무 빠르지 않게, 반쯤 빠르게!
우아한 쇠퇴론은 인구감소라는 국가적 위기에 대비하여 상당한 진통이 예상되는 ‘개혁’이나 ‘혁신’을 단행한다기보다, ‘쇠퇴’라는 현상을 인정하되 ‘우아하게’ 위기의식을 전환하려는 노력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현상 유지적인 대안으로 보인다. ‘우아한’이라는 형용사와 ‘쇠퇴’라는 명사의 결합은, 국가 위기에 대한 대응치고는 너무 소극적이라는 의문마저 드는 게 사실이다. 눈만 뜨면 ‘개혁’ 혹은 ‘혁신’을 운운하고 마누라만 빼고 다 바꿔야 한다”라는 과격한 표현에 익숙해 있는 우리로서는 지나치게 ‘우아한’ 해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에 앞서 자기 자신을 먼저 사랑하는 것, 하루에도 몇 번씩 스스로에게 기분이 어떤지 물어보고 그 대답에 귀를 기울이는 것, 자신의 욕구를 인정하고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것, 이제 타인에게는 적절히 무책임할 수 있는 것, 타인을 돌보느라 자신의 감정을 소홀히 하지 않는 것……, 이런 삶을 살 수 있는 것이야말로 나이가 주는 가장 큰 선물이 아니겠는가.
은퇴를 원래의, 자연 그대로의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사건이나 계기로 볼 수는 없을까? 인생의 한 단계를 졸업하고, 더 높은 또 하나의 단계로 올라가는 계기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 오랫동안 입었던 몸에 맞지도 않는 두껍고 거추장스러운 갑옷을 벗고 원래의 나 자신으로 돌아가는 계기, 그래서 자연스럽고 솔직하게 나답게 살아가는 계기로 삼을 수는 없을까? 그렇다고 해서 과거를 잊으라는 건 아니다. 인생의 험난한 과정을 잘 통과했다는 자부심은 간직하는 것이 좋다. 단지 그 속에서 함께한 갑옷은 버려야 한다. 갑옷은 갑옷이자 하나의 껍데기일 뿐, 진정한 알맹이는 나 자신이니까.
‘바쁘다, 바빠’를 입에 달고 뛰어다니던 사람들에게 은퇴란 ‘이제 전혀 바쁘지 않은’ 낯선 일상과의 만남이다. 은퇴 후의 나날은 얼핏 어린시절에 경험했던 방학과 닮아 있지만, 양자 간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방학은 짧을수록 달콤한데, 불행하게도 은퇴 후의 방학에는 언제 개학할지 기약이 없다. 그래서 달콤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없으니 재미도 줄어드는 것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통계자료는 현재의 은퇴자들이 하루 시간의 대부분을 매우 소극적이고 정적인 여가 활동으로 채우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의 하루는 길고 지루하다.
일정한 나이가 되면 삶을 즐기는 것, 즉 마음껏 노는 것이 일보다 더 중요해진다. 즉 나이 들수록 일보다는 놀이에 더 많은 가치와 비중을 둬야 한다. 혹은 ‘벌이로서의 일’보다는 ‘놀이로서의 일’을 찾아야 한다. 한창 일할 때 제대로 일하지 못하는 사람이 정체성에 문제를 일으키듯이, 놀아야 할 때 제대로 놀지 못하는 사람은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히고 이상한 행동을 한다. 가족이나 자녀에게 지나친 애정을 쏟거나 간섭하여 질리게 하고, 결국은 스스로를 외톨이로 만들고 마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차별이 그러하듯이, 연령차별 또한 나이 든 사람들 자신의 문제의식과 변혁 의지가 없으면 결코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이다. 즉 나이 든 사람들 스스로가 ‘연령’ 때문에 받는 부당한 차별이나 세상의 평판, 도덕적 잣대에 대해서 홀연히 맞서서 싸울 준비를 하고, 또 싸울 수 있는 ‘힘’도 길러야 한다. 또한, 나이 든 사람들이 자신의 강점을 보여줄 수 있는 ‘실력’과 ‘매력’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