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정녕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었다. 뱉을 겨를도 없이 목구멍을 넘어가고 있는 독약이었고, 꼼짝할 수 없이 결박당한 채 신경 마디마디를 찢기는 고문(拷問)이었다.
오래 살았으니 어쩌겠다는 것인가.
그 변함이 없는 차가운 목소리, 소름이 쭉쭉 끼쳐오는 웃음 소리. 그놈은 사람이 아니다. 원한 맺힌 신씨 문중 사람들의 원귀(寃鬼)일 것이다.
그놈의 애비 에미는 도대체 누구인가.
그놈은 신가 어느 누구의 자식인가.
어떻게 모든 걸 알아냈을까.
만날 필요가 없다고? 그놈은 어떻게 할 작정일까.
아니, 이쪽에선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29년― 가슴 조이고 두리번거리며 살아온 세월. 천신만고 끝에 이루어놓은 모든 것들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는 것인가.
죄는 무엇인가. 세월이 이렇게 길게 흘렀는데도 죄는 그대로 남게 마련인가.
―배점수 씨, 당신 너무 오래 살았다고 생각하지 않소? --- 「인간 연습」중에서
영감은 술잔을 반쯤 비우고는 담배를 빼물었다. 담배에 불을 붙이는 영감은 신들려 오는 무당처럼 아까와는 거리가 먼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근디, 고 상것들의 대장이 기절초풍헐 인물이었당께. 시악씨맹키로 얌전허던 국민핵교 방 선상이었어. 사람이 고렇크름 무선 것이여. 고 말 웂고 순허디순헌 방 선상이 맘속에 빨갱이 사상을 담고 있을 줄 그 누가 알았을 것이여. 고 방현우 밑에서 부대장을 한 것이 대장깐을 허든 배점순디, 모든 일은 요것들 둘이서 비벼묵고, 말아묵고 다 혔어.”
형민은 숨을 멈추며 상 아래서 두 손을 맞잡았다. 마침내 아버지 이름 석 자가 튀어나왔고, 형민은 자신의 안색이 변하는 것 같은 긴장을 느꼈다.
“배점수헌티 뿔근 물 딜인 방가놈도 못쓸 놈이제만, 뿔근 물 처묵고 미쳐 돌아간 배점수 고놈은 더 숭악헌 놈이었당께. 워메, 고놈 징헌 건 말로 다 못혀. 막말로 고것들 시상이 두어 달만 더 끌었다면 붕알 달린 신씨 성받이는 씨가 몰라(말라)부렀을 것잉마. 딴 동네 것들이 다 대창 갖고 설쳤는디, 우리 세 동네 것들만 시퍼런 쇠창인 것도 바로 그 배점수놈이 한 짓거리여. 아 그 육시헐 놈이 사람들 눈 피해감스로 우리덜 찔러 쥑일 그 시퍼런 쇠창을 두고두고 맹글었다고 생각혀 보소. 지끔 생각혀도 치가 부들부들 떨리는 일이 아니고 멋이여. 우리덜언 고런 것도 모르고, 고놈덜 굽실거리는 인사를 받고 태평시럽게 살았드란 것이여.” --- 「인간의 문」중에서
아버지를 죽인 원수라는 배점수라는 사람에 대해서였을까. 아니면 또다른 어떤 이야기가 있었던 것일까. 그러나 죽음과 맞선 어머니의 의지는 그 마지막 말을 미처 끝내지 못하고 허물어진 것이다.
찬규는 차가운 어머니의 주검을 응시한 채 평생 어머니를 괴롭혀 왔던 가슴앓이, 어머니의 목숨을 조금씩 조금씩 갉아먹어 온 그 가슴앓이를 만들어낸 한의 정체를 비로소 선명하게 보고 있었다. 남편을 죽인 원수의 사진을 간직한 채 복수의 원한을 가슴속으로 끓이며 어머니는 20년의 세월을 살아온 것이었다. 그 원한이 가슴앓이를 일으키는 병균이었고, 어머니는 그 병균을 키워가며 가슴앓이의 고통에 시달리고 촛불이 제 몸을 태우듯 스스로의 목숨을 조금씩 조금씩 죽여가고 있었던 셈이었다. 한이 서리서리 엉켜 생긴 병이니까, 의사가 고칠 병이 아니라 마음으로 고쳐야 하는 병이라는 이모의 옛말이 지금 옆에서 하고 있는 것처럼 확실하게 들려왔다. --- 「인간의 계단」 중에서
고향을 등지게 되고, 세월이 흘러가는 것과는 상관없이 그때의 기억들은 문득문득 험상궂은 얼굴로 나타나서 점수를 괴롭히고는 했다. 그 기억들을 떼쳐내려고, 그 기억들의 포위에서 벗어나려고 무진 애를 써보았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그 기억들은 어쩌면 영원히 핏속에 스며들어 버린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그 숱한 기억들 속에 그 여자를 범한 일은 들어 있지 않았다. 아마 너무 큰 사건들 속에서 그 일은 사소한 것으로 묻혀지고 만 것이었으리라.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하고 사흘째 되던 날 전화 속의 사나이는 마침내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신병모 씨는 내 아버지요. 이 말을 듣는 순간 황 사장은 머리가 펑 터지는 것 같은 충격에 부딪혔고, 자꾸만 가물거리는 의식을 붙들려고 안간힘 쓰며, 니는 내 새낄 것이여, 틀림없이 내 새낄 것이여 하는 절박한 생각에 몰렸다. 그리고 자기 핏줄에게 죄 갚음으로 목숨을 위협당해야 하는 기막힌 기구함에 절망하며 황 사장은 정신을 잃어버렸다.
--- 「인간의 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