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은 고요하다. 세례자가 나타나 외친다.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잠시 후 예수가 와서, 자신이 오실 '사람의 아들'임을 알고, 이 세상의 수레바퀴를 돌려, 정상적인 모든 역사를 끝장낼 마지막 혁명으로 굴러가도록 만든다. 그 수레바퀴가 굴러가기를 거부하자, 그분은 그 위에 자신의 몸을 던진다. 그러자 그것이 굴러가 그분을 깔아뭉갠다. 그분은 종말론적 조건들을 초래하는 대신에, 그것들을 파괴시켰다. 수레바퀴는 앞으로 굴러가, 자신을 인류의 영적 지배자라고 생각하고 역사를 자신의 목적대로 바꾸려 했을 만큼 충분히 강했던, 더 할 나위 없이 위대한 인간의 깔아뭉개진 몸은 그 바퀴 위에 매달려 있다. 이것이 그분의 승리이며 그분의 통치이다.
Albert Schweitzer, 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1968:370-371)
20세기가 시작될 때, 알버트 슈바이쳐는 탁월한 논증과 분석을 통해, 지난 150년 동안의 역사적 예수 연구가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선생을 만들어냈다고 비판하고, 본래의 종말론적이며 묵시적인 예언자의 모습으로 대치시켰다. 이처럼 윤리적인 모습과 종말론적인 모습이 대비되는 당시의 분명한 이분법의 맥락 배후에는 또 다른 이분법들, 즉 자유주의 대(對) 보수주의, 자연 대 초자연, 이성 대 신앙, 역사 대 신화라는 이분법이 존재했다. 그러나 이처럼 구체적이며 중요한 계몽주의 논쟁의 줄기들을 잠시 제쳐놓는다면, 지혜의 교사로서의 예수 대(對) 묵시종말적 예언자로서의 예수 사이의 분열은 예수전승의 초창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추적할 수 있다. 나는 물론 1세기의 그 이분법의 양편 모두가 초자연적 신앙에 근거하여 말하고 있으며, 또 그 양편 모두가 자신들의 해석에 대해 신화적 배경을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또한 우리가 예수의 묵시종말적(apocalyptic) 비전과 지혜적(sapiential) 비전이 결합되고 융합된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도 강조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서로 상치될 때는 그것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현재를 다루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방식을 드러내는 것이다. 즉 우리는 지혜적 방식으로, 과거로 돌아가 잃어버린 에덴에까지 돌아갈 수 있거나, 아니면 묵시종말적 방식으로, 미래로 나아가 임박한 하늘로 나아갈 수도 있다. C.E. 50년대에 비롯된 다음 세 가지 경우들이 이 문제를 분명하게 드러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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